신대철 시인 / 분꽃씨
노을 번지는 초저녁 노란 나비떼가 가뿐 가뿐 내려앉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니 나비떼가 꽃 속으로 사라지고 노란 분꽃만 남아 있었다. 누가 사는지 궁금하여 집 앞에 서 있었다. 짖지 않는 개가 몸을 수색하고 안으로 들어간 뒤 눈주름이 깊은 사내가 나왔다. 서울 변두리에서 불법체류자로 쫓겨 다닐 때 공장 한구석에서 숨어 지내다 말라죽는 꽃에 속이 타 밤마다 물을 주었다고 했다. 한국에서 가져온 것은 그 꽃씨뿐이라고 했다. 꽃씨를 받아가도 괜찮으냐고 물었다. 사내는 몸을 움츠렸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눈가에 물기가 어려 있었다. 이듬해 여름 아침 서울 변두리 언덕집에 분꽃이 피었다. 몽골에서 가져온 것은 그 꽃씨뿐인데 흰 날개와 노란 날개를 나풀거리며 나비떼가 가뿐가뿐 내려앉고 있었다.
-시집 『바이칼 키스』에서
신대철 시인 / 벌하고 꽃한테만 일 시키지 말고
울안에 마지막 남은 흰 진달래를 누가 가져갔습니다. 수소문 끝에 알고 보니 호수 건너 젊은 선생님이더군요. 꽃나무 한 뿌리 얻어가려고 했는데 아무도 없어 가져갔다는군요. 아버지는 꽃나무를 찾으러 가셨다가 빈손으로 돌아오셨습니다. 선생님이 집에 있는 바람에 그냥 오셨다는군요. 민망하지 않게 아무도 없을 때 가져오시려고요. 할머니는 땀 흘려 거둔 것이 아니고 산에서 가져온 것이니 눈앞에 두고 보는 사람이 임자라 하시는군요. 마티 고랑을 다 뒤져 겨우 그 한 뿌리 캐온 줄 아시면서 아버지 편을 들지 않으시는군요. 꽃보다 곡식과 사람을 생각하라고 하시는군요.
그 일이 있은 뒤 꽃밭은 채소밭으로 바뀌었습니다. 무 오이 고추 감자 꽃이 햇빛을 놓치지 않고 열심히 꽃을 피웠습니다. 벌 나비가 몰려들었습니다.
할머닌 빈 벌통에 벌이 들었다고 벌하고 꽃한테만 일 시키지 말고 골도 파고 물도 줘야지 하시는군요.
-시집 『바이칼 키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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