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수일 시인 / 바다는 봉동댁이다 입 가득 흰 물꽃을 덕석말이처럼 몰아 와 들이붓는 파도를 봅니다 파도는 해안선 한 줄을 그려 놓고 줄행랑을 칩니다 연이어 또 한 무더기 포말이 밀려오더니 해안에 들이붓습니다 온갖 쓰레기 더미로 해안선 하나가 또 그려집니다 태왁이며 부표이던 스티로폼, 플라스틱병이며 폐비닐들, 알맹이 없는 빈 껍데기들입니다
간이며 쓸개까지 다 빼주고 평생을 품어 키우던 팔뚝만 한 방어, 다랑어, 부시리 가슴 깊이 숨겨 너울거리던 붉은 꽃, 크릴새우 치어들까지 싹쓸이해 가도 더 못 주어 미안하다고 쩔쩔매던 여자의 표정이곤 하는 바다,
서른 줄에 홀로 되어 홀시어미와 일곱 자식을 홀로 건사하다 늙어 자식들 짐 될까 울지도 떼쓰지도 않고 요양원으로 걸어 들어간 봉동댁 논밭으로 시장으로 달려 다니다 관절은 너덜거리고 빈 껍데기로 병든 늙으니 돈 쓸 일 없다며 보일러 끄고 전기장판으로 겨울을 나던 전기장판 아래 모아둔 쌈짓돈이며 통장 아들 손에 쥐여 보내고 자식이 힘든데 이깟 금붙이가 무슨 소용 있냐며 반지며 팔찌며 목걸이까지 빼내 아들 손에 건네주던 봉동댁 한 부모는 열 자식 거둬도 열 자식은 한 부모도 못 건사한다던 옛말이 생각나는
거기 가서 살아 나온 사람 하나도 못 봤다며 도리질하던 그곳을 좋아지려고 가는 것이니 울지 말라며 씩씩하게 걸어 들어간 여든넷 봉동댁, 엄마
간도 쓸개도 다 빼준 검은 갯벌에 숨겨 키우던 새끼 조개들까지 다 긁어가고서 비닐 쪼가리들 투척해 푸른 낯빛을 잃고 거무칙칙 병들어 가는 바다는 내가 아는 봉동댁과 쏙 닮은 간도 쓸개도 다 빼주고 병든 몸으로 돌아누운 셈법도 모르는 바보입니다
조수일 시인 / 유월의 망초
나는 유월이 낳은 바람 붉은 젖가슴이면 어디든 날아들지요 젖멍울 비집고 꽃으로 피지요 흔하디흔해 쉽사리 눈에 띄나 마음의 점선 밖으로 금세 밀려나고 마는 한 철 짧은 노래이지요 말갛게 아침을 씻기는 이슬이 유일한 치장 빨갛고 노란 화려한 유색인종의 교태는 언제나 나를 앞지르는 선구자들 이어 수줍게 흔들리거나 건들리는 것이 내 몸이 부리는 유일한 수식이지요 몸에 길을 내려 수 세기의 푸른 허밍의 바람은 나를 들쑤셔요 터벅터벅 물결을 새기며 걷는 한량한 낙타의 걸음새가 어쩌면 나인지도 몰라요 짝을 이루며 노을 진 덤불 속으로 드는 날짐승들의 천진은 언제나 황홀히 꿈꾸는 먼 지점이기도 할까요 들판 가득 한 무리를 이루며 세기를 앓듯, 시절을 앓듯 불어오는 방향에 몸 맡긴 채 흔들림을 먹고사는 닿을 수 없는 망중한처럼,
당신의 들판 가득 희게 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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