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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고안나 시인 / 초승달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2. 25.

고안나 시인 / 초승달

 

 

마시다 만 술잔 잊힐 만하면

그 입술 지울 만하면

너는 내 눈 높이까지

하늘의 사닥다리 타고 내려와

못 다 비운 술잔 찰랑거린다

그 때, 가득 찬 술잔만 있었지

넘실넘실 차오르던 이야기만 담겼지

어두움은 배경일 뿐

술 반, 어둠 반

무시로 불던 바람에

기우뚱거렸다 다시 일어설 때

와락 쏟아질까 가슴 조리던 때

잊힐 만하면

다시, 그 자리

이젠 나 돌아서서 걸을까?

 

 


 

 

고안나 시인 / 사이라는 거리

 

공복을 참지 못한 바람 한 점이

매달리지도 않은 토마토 이파리를

뒤적거리자 아직 때가 아니라며

토끼 이빨 같은 젖니 들어낸

까마중이 따라뒤척인다

위에서 아래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이리저리 비틀다 허탕 친 채

덩굴손 붙잡고

철망 쪽으로 끌고 갈 모양이다

마음먹은 대로 따라갈 것만 같았던

초록손은 싫다는 듯 자꾸 뿌리친다

철망 사이가 천길이다

그 사이로 바람이 들락거리고

어제는 비가 다녀갔다

어차피 누군가 붙잡은 채

한 해를 살아야 할 조막손

아무 손이나 잡을 수 없다고

천리 길 앞에서 망설인다

언젠가 당신도 나를 앞에 놓고

내가 그랬던 그 때처럼

 

 


 

고안나 시인

1958년 경남 고성 출생. 본명: 고혜은. 2010년 《부산시인》, 《시에》를 통해 등단. 시집으로 『양파의 눈물』이 있음. 요산문학제, 부산일보, 한국예총 문예공모 수상. 호미곶문학상 수상. 백산여성문예상 수상. 한민족사랑문화인협회, 부산시인협회 회원. 대구시인학교 문화부장. <사림시> 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