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안나 시인 / 초승달
마시다 만 술잔 잊힐 만하면 그 입술 지울 만하면 너는 내 눈 높이까지 하늘의 사닥다리 타고 내려와 못 다 비운 술잔 찰랑거린다 그 때, 가득 찬 술잔만 있었지 넘실넘실 차오르던 이야기만 담겼지 어두움은 배경일 뿐 술 반, 어둠 반 무시로 불던 바람에 기우뚱거렸다 다시 일어설 때 와락 쏟아질까 가슴 조리던 때 잊힐 만하면 다시, 그 자리 이젠 나 돌아서서 걸을까?
고안나 시인 / 사이라는 거리
공복을 참지 못한 바람 한 점이 매달리지도 않은 토마토 이파리를 뒤적거리자 아직 때가 아니라며 토끼 이빨 같은 젖니 들어낸 까마중이 따라뒤척인다 위에서 아래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이리저리 비틀다 허탕 친 채 덩굴손 붙잡고 철망 쪽으로 끌고 갈 모양이다 마음먹은 대로 따라갈 것만 같았던 초록손은 싫다는 듯 자꾸 뿌리친다 철망 사이가 천길이다 그 사이로 바람이 들락거리고 어제는 비가 다녀갔다 어차피 누군가 붙잡은 채 한 해를 살아야 할 조막손 아무 손이나 잡을 수 없다고 천리 길 앞에서 망설인다 언젠가 당신도 나를 앞에 놓고 내가 그랬던 그 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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