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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한설아 시인 / 선풍기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2. 25.

한설아 시인 / 선풍기

 

 

페달을 밟으며 전장의 트랙을 돌고 있습니다

부른 적 없는데

불현듯 날개 사이로 쏟아져 내리는 사람들

프로방스의 라벤더 향기가 만발하게 핀 계절

그 계절을 따라온 것일까

곳곳을 돌다 제자리로 돌아간 부메랑 같은 사람

바람에 가면이 벗겨진 의문의 여자

네 발로 빠르게 도주하는 켄타우로스*

날아다니거나 영영 날아갔거나

바람에 쉽게 꺾이지 않는 먼지는

만발의 준비를 갖춘 그들만의 언어라 해두자

강풍에 날려 온 이들이 어딘가에 부딪혀 떨어지고

기웃대며 자리를 찾는 날개와 날개

원하는 곳에 원하는 속도로 공기는 늘 머물곤 한다지

잠깐씩 뒤척이는 잠꼬대는

그들의 몽환 속에 내가 날고 있을지도 모를 일

고르지 못한 화질에 간간히 따라붙는 메아리

그들의 눈에서 나를 빼내 오다

목이 길어진 바람

하루를 또 넘기고 있는 바람, 바람

​​

켄타우로스* :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괴물(怪物) 상반신은 인간이고 하반신은 말이다

 

 


 

 

한설아 시인 / 펑키 타운*

 

 

빠르게 재단된 단어들은 어딘가에 꼭 박히는

티타늄 총알 같아요

눈과 귀가 가려워요

도시 반대편에 진균들이 번져갔거든요

가짜 상영관에 진짜 펑키족들이 관람을 하고

기울어진 짝다리로 거만하게 떼창을 불러댔어요

부식을 모르는 말들은

가늘고 길게 찍어대는 뿔난 첨자들이죠

수수한 전두엽에 총구를 겨누지 마세요

반대편의 소리는 세상의 소리와 노래가 될 수 없어요

묶음의 변방은 발밑이 자유로워요

아이스크림 가득 담아가는 저 청년도

앞장서서 달리는 저 운전자도

우리는 우리라서 괄호에 쉽게 갇히지 않았어요

어제와 오늘은 뚜렷한 흔적을 남기며 출몰해요

당신의 발끝은 어디를 향해 있나요

모두 모두 도시 중앙으로 나오세요

영혼의 말들을 대기권 밖으로 쏘아 올려야 해요

번갈아 발끝을 모으고 아득해진 거리를 당겨야 해요

어느 곳에서나 똑같은 노래로 불러져야 하니까요

스카프 매듭이 목을 따갑게 스치는

벌써 여름이 왔나 봐요

 

*펑키 타운-파격의 도시 (80년대 팝송을 인용함)

 

 


 

 

한설아 시인 / 쇼윈도

 

 

롤스크린이 올라가면 망상은 청아하게 감겨요

언제나 투시하며 북적이는 시선들

출입문에 들어서면 달달한 머스크 향이 나요

보이지 않는 거인이 호객하는 것만 같죠

노을이 슬금슬금 이마를 넘어가면

앞뒤가 잘린 줄거리만 외쳐대는 3D 전광판

롤스크린 내리고픈 날은 잉여인간들이 많은 날

거만한 언어가 핑퐁처럼 튕겨오면

부드럽게 연결 타를 날려야 속들을 내놓는 평정

송곳니 같은 발언은 기운이 빠져요

덜미에 들이대며 피를 쪽쪽 빨아대는 드라큘라 같죠

성에꽃은 별꽃과 닮았지만 전혀 상이해요

칼바람에 시퍼렇게 질린 겨울 하늘을

입김을 쏘아 올려 살살 녹여야 별꽃은 피거든요

튕겨 나간 눈들은 나를 외면하고 걸어요

검은 안팎을 닦다 밖으로 시선을 던져보는 그녀

둥 뒤, 다육식물 초록 뿔들은 다정히 돋아나는 중이죠

몇 개의 별들이 지갑에 누운 날은 어둑어둑한 밤

풍경 추가 조곤조곤 딸랑이다 번져요동공들이 점점 커지는

 

 


 

 

한설아 시인 / 발톱

 

 

오늘도 구덩이 속으로 점점 빠져들고 있어요

아치형으로 하강 중인 너는 내향성 발톱*

하루의 반나절은 악어가 물고 있는 거 같아요

당신은 당당한 11자 걸음이신가요우린 특정한 곳에

혈흔 하나쯤을 숨긴 내향성 발톱이 되어 가는 사람들

축축한 장화 속에선 새살이 차오르지 않아요

윤곽이 흐린 어설픈 발도장이지요

치켜뜬 그 무엇이 나를 의기소침하게 할 때

악어 이빨에 끼인 비척거리는 오늘을 빼내야 해요

케케묵은 이야기는 전동 드릴로 스케일링하고

부목 댄 발톱이 원형이 되기까지

부드럽게 삭제, 삭제, 삭제, 파일링을 하세요

사자를 독수리를 아니면 고양이를 원하시나요

정수리에 당신만의 캐릭터를 그려 보세요

구덩이 속은

불투명한 여백이거나 덜컹이는 소란입니다

지리멸렬한 장화는 우주로 던져버리세요

새살 돋는 솔기들이 봉합이 되어갈 때

족적에 붙을 수식어는 잘 익은 오늘이고 앞날입니다

이 밤

전깃줄을 둥글게 움켜쥔 발톱들, 새들은

유연한 편자를 신었나 봅니다

산책로 따라

환승한 구두가 뛰어갑니다

 

*내향성 발톱 : 발톱이 살 속으로 파고들어 염증과 통증이 발생하는 질환.

 

2021년 《시와 경계》 가을호 신인작품상 당선시

 

 


 

한설아 시인

1970년 전북 정읍에서 출생. 본명: 한은아. 2021년《시와 경계》 가을호 신인작품공모에 〈선풍기〉 외 3편이 당선되어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