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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하종오 시인 / 생활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2. 25.

하종오 시인 / 생활

 

 

직장생활 근 십년이 되었습니다.

밥과 돈에 얽혀드는 삶이 싫어서

시 쓰는 일을 아름답게 여겼던 생각

그마저 잊고 아홉 살배기 아들 장래 걱정합니다.

자식에게 보람 두는 사람들의 참다움도 알고

먼저 그렇듯 살아가는 나를

조금도 부끄럽게 느끼지 않는 뻔뻔함도 늘었지요.

시인이라고 해서 이 일상을 버리라고 한다면

쳐다보면 늘 있는 푸른 하늘도 형벌입니다.

 

세월이라는 것도 저대로 오고가지 않고

아비들이 모여 간난과 고통에 늙고

자식들이 커서 낫게 살아내는 만큼

깊어져서 늘 오늘 하루인 거지요

 

에잇, 내 시가 못마땅해 가타부타하는 분들

내게서 떠날테면 떠나라지요 떠나라지요

시인한테는 밤하늘 달무리만 있읍니까요

밥과 돈이 인간을 바꿔 버린다는 것을 알고부터

하루하루가 나에게는 늘 같은 오늘로 깊은 세월이었습니다.

무섭고 괴롭고, 그래도

직장생활 나는 계속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시집 <꽃들은 우리를 봐서 핀다>

 

 


 

 

하종오 시인 / 아버지 뫼로 누우시고

 

 

생전에 업적도 없이 사셨던

아버지 높은 산비탈에

낮은 뫼로 누우시고

못난 자식들만 살아남아서

몇 가지 남기신 유품을 나눠 가져가고

죽으셔서 아버지 더욱 가난해지셨읍니다만

세상에 태어나서 일하고

늙고 병들어 죽으시고

아버지 그 한평생이 흙이 되셨으니

이제 그 옆에 언젠가

어머니 묻힐 작은 뫼 하나 만들고 싶으시겠지요?

그것이 아버지 전재산인 것을

풀꽃 풀벌레 데리고

이 산 저 벌판

사람 사는 마을로 꼭 한 번 내려오시는 일이

아버지 내려오셔서 못난 자식들 살피시는 일이

앞으로 하실 일인 것을

생전에 업적도 없이 사셨던

아버지 높은 산비탈에

낮은 뫼로 누우시고

 

-시집 <꽃들은 우리를 봐서 핀다>

 

 


 

하종오 시인

1954년 경북 의성에서 출생. 1975년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쥐똥나무 울타리』 『벼는 벼끼리 피는 피끼리』 『사물의 운명』 『꽃들은 우리를 봐서 핀다』 『정』  『깨끗한 그리움』 『님시편(詩篇)』 『님』 『님 시집』, 『무언가 찾아올 적엔』 『반대쪽 천국』 『지옥처럼 낯선』 『국경 없는 공장』 『아시아계 한국인들』 『베드타운』 『입국자들』 『제국(諸國 또는 帝國) 』 등이 있음. 반시(反詩) 同人으로 활동. 1983년 신동엽문학상. 제1회 불교문예작품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