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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허의행 시인 / 시시한 순수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2. 25.

허의행 시인 / 시시한 순수

 

 

 시시해도 짐승 아닌 인간으로 태어난 것이 자랑이며 다행입니다 시시한 사람들도 마주하면 가슴은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따뜻합니다 세상에 아무것도 아닌 사람은 없기에 아무것도 아닌 시시한 사람임을 소중히 간직하고 아무렇지 않은 척 태연하게 살아갈 줄 압니다 과거를 회상하며 현실을 직시하고 미래를 꿈꾸며 한순간도 버릴 수 없어 열심히 살았으며 떳떳하게 살지 못했어도 비겁하지 않았으며 아무렇게나 되는대로 살지 않았습니다 지식은 과시하고 거만하지만 시시한 순수함은 진실입니다 삶이 힘들고 어렵고 지겨웠어도 치사스럽지 않았으며 순수했던 시시한 사람들의 시시한 존재를 생각했습니다

 

 천하고 두렵고 괴로운 삶도 부끄럽거나 서러워하지 않았으며 불행하다고 생각지 않았습니다 무미건조한 무색의 빛깔 없는 아무것도 아닌 시시한 시간을 날마다 무사히 보내주면서 행복하다고 기도했습니다 어떠한 힘에도 굽실거리며 아부하지 않았으며 우아함과 근사함보다 소박함을 좋아했고 지혜로움보다 진실하게 살았습니다 모습은 늙어서 변해 가도 순순한 마음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시시한 사람이 시시하게 죽었을 때 시시한 사람들은 죽음도 아무것도 아닌 척 살아갈 줄 압니다 생명까지도 시시하게 여기며 날마다 해가 뜨고 지는 것도 시시하다고 생각했으며 해가 뜨지 않는다 해도 아무렇지 않습니다

 

 


 

 

허의행 시인 / 가난한 데이트

 

 

 사랑을 지탱하기 위하여 데이트의 밤 포장마차 가락국수를 먹는다 배고픈 너에게 가락국수 몇 젓가락과 국물을 더 건네주고 부족한 입맛을 다시며 일어서야 했던 순간, 껍데기만 남은 사내는 부끄러운 자존심이 상했었다 사랑도 등급으로 구별되는 것 계약직도 아닌 시간제 아르바이트는 카페의 따뜻한 아메리카노 커피 한 잔을 넘보다 편의점 앞 자판기에서 500원 막 커피를 빼 먹으며 서로 웃던 웃음은 가야 할 방향을 잃고 발길 따라 걸었다 젊은 날의 사랑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고 하는데 사알을 사치로만 여기고 추억으로만 남겨야 할 짖도 없고 뜻도 없는 허탈한 마음을 나누며 사랑은 버겁고 짐스러웠다 손을 잡고 걷고 싶었던 망설임도 서로 죽어서도 사랑하겠다는 말을 거듭할 수도 없었다

 

 희망도 없는 헤어짐과 만남을 반복하면서 불안한 날들을 골목길 폐쇄회로 감시 카메라에 서툰 사랑의 영상을 기록으로 남기며 헤어짐을 아쉬워했다 헤어질 고뇌가 없었다면 행복했겠지만 떠나버릴 것 같은 불안한 순간은 안타까웠어도 내 안의 진정한 사랑은 없어지지 않았다 배고프면 지극했던 애원도 기대했던 키스의 감정도 싫어지는 것 아르바이트는 경험이 아니라 생존인데 젊음의 일당을 벌어 강남 명가에서 소 갈빗살 '잉글리시 컷'을 먹고 싶었다 사흘을 일해도 부족한 값인데 마주 보고 와인 잔을 부딪치며 꽃등심 스케이크나 코스요리를 먹는 호텔 식당의 뎅트는 아르바이트 닷새는 벌어야 한다 홍대 앞 돼지껍데기 바비큐에 고추장 소스 발라 맵고 고소하고 바삭한 치차론은 4000원이란다

 

 


 

허의행 시인

충북 충주 산척에서 출생. 1989년 《충청일보》 신춘문예 당선. 1994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달래강 설화』 『꽃잠』 『0그램의 시』 『삼류시인의 삼류  시』 『시시한 순수』 등이 있음.  현재 충북작가 · 충주작가 회원. '마음을 가리키는 시' 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