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욱진 시인 / 보리밥
오지랖 넓은 고향친구 녀석 어디서 금세 퍼온 따끈따끈한 글이라며 보리밥 한 그릇 퍼 담아 보냈습니다
빙판에 넘어져 엉치뼈 부러진 노인 앉은뱅이 되었다가 보리죽 한 달 끓여먹고 벌떡 일어섰다네요
이전엔 지랄 염병하고 돌아다니는 역병도 보리죽 먹고 귀신처럼 다 나았다네요
이밥에 고깃국만 먹고 산 양반네들이야 콧방귀 뀔 얘기지만 보릿고개 넘기고 살아온 나야 눈 버쩍 뜨이는 반가운 소식이지요
ㅎㅎ친구야, 어릴 적 우리가 먹은 꽁보리밥이 코로나 백신이었네그려
시래깃국에다 보리밥 한 그릇 말아먹는 이 저녁
김욱진 시인 / 노모 일기․2
모처럼, 미수米壽를 바라보는 어머니가 손수 장만한 칼국수 온 가족이 두레반에 둘러앉아 후루룩 소리 내어 먹는다 주물럭주물럭 반죽한 밀가루 안반 위에다 올려놓고 풍진 세상 모퉁이 돌고 돌아 홍두깨로 모난 녀석 볼 한 번 더 비벼주며 키 몸무게 자로 재듯 빚은 손칼국수 어머니 손맛이 절로 느껴지는 저녁이다 바른손 새끼손가락이 불쑥 튀어나올 상 싶으면 약지 중지 손구락은 원을 그리며 다독이고 왼손 엄지 중지에 지그시 힘 실어주는 어머니의 손끝은 섬섬옥수다 둥근 세상 일궈가는 어머니 손놀림 어깨 너머로 훔쳐보며 우리 칠 남매는 저마다 한 가락씩 하는 손가락을 내밀고 겻불에 국수 꼬랑지 구워 나눠 먹는 법 익혔다 그러는 사이, 바람에 밀리고 밀린 안반은 헛간으로 밀려나 버렸고 한평생 국수만 밀어댄 홍두깨는 부지깽이처럼 가늘어졌다 밀고 당기는 게 뭔지도 잘 모르는 국수 꼬랑지 녀석들은 제 앞길 틔운다며 이곳저곳 떠밀려 다니기 일쑤 세상은 어느새 우리 가족을 두레반 밖으로 제각기 밀어내고 있는 이 마당 한복판에다 나는 어릴 적 둘둘 말아뒀던 멍석을 깔고 마누라는 어머니 대를 이어 국수를 밀고 아이들은 마당 가 피워둔 모깃불 옆에서 앵앵대는 모기처럼 눈물 훔치며 국수 꼬랑지 구워 먹고 저 하늘 별들은 손칼국수 국물에 반짝반짝 빛나는 양념 듬뿍 뿌리며 옹기종기 모여 앉은 한여름 밤, 저녁은 별미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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