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김욱진 시인 / 보리밥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2. 25.

김욱진 시인 / 보리밥

 

 

오지랖 넓은 고향친구 녀석

어디서 금세 퍼온 따끈따끈한 글이라며

보리밥 한 그릇 퍼 담아 보냈습니다

 

빙판에 넘어져 엉치뼈 부러진 노인

앉은뱅이 되었다가

보리죽 한 달 끓여먹고 벌떡 일어섰다네요

 

이전엔 지랄 염병하고 돌아다니는 역병도

보리죽 먹고 귀신처럼 다 나았다네요

 

이밥에 고깃국만 먹고 산 양반네들이야

콧방귀 뀔 얘기지만

보릿고개 넘기고 살아온 나야

눈 버쩍 뜨이는 반가운 소식이지요

 

ㅎㅎ친구야, 어릴 적 우리가 먹은

꽁보리밥이 코로나 백신이었네그려

 

시래깃국에다 보리밥 한 그릇

말아먹는 이 저녁

 

 


 

 

김욱진 시인 / 노모 일기․2

 

 

모처럼, 미수米壽를 바라보는 어머니가 손수 장만한 칼국수

온 가족이 두레반에 둘러앉아 후루룩 소리 내어 먹는다

주물럭주물럭 반죽한 밀가루 안반 위에다 올려놓고

풍진 세상 모퉁이 돌고 돌아

홍두깨로 모난 녀석 볼 한 번 더 비벼주며

키 몸무게 자로 재듯 빚은 손칼국수

어머니 손맛이 절로 느껴지는 저녁이다

바른손 새끼손가락이 불쑥 튀어나올 상 싶으면

약지 중지 손구락은 원을 그리며 다독이고

왼손 엄지 중지에 지그시 힘 실어주는 어머니의 손끝은

섬섬옥수다

둥근 세상 일궈가는 어머니 손놀림 어깨 너머로 훔쳐보며

우리 칠 남매는 저마다 한 가락씩 하는 손가락을 내밀고

겻불에 국수 꼬랑지 구워 나눠 먹는 법 익혔다

그러는 사이, 바람에 밀리고 밀린 안반은 헛간으로 밀려나 버렸고

한평생 국수만 밀어댄 홍두깨는 부지깽이처럼 가늘어졌다

밀고 당기는 게 뭔지도 잘 모르는 국수 꼬랑지 녀석들은

제 앞길 틔운다며 이곳저곳 떠밀려 다니기 일쑤

세상은 어느새 우리 가족을

두레반 밖으로 제각기 밀어내고 있는 이 마당

한복판에다 나는 어릴 적 둘둘 말아뒀던 멍석을 깔고

마누라는 어머니 대를 이어 국수를 밀고

아이들은 마당 가 피워둔 모깃불 옆에서

앵앵대는 모기처럼 눈물 훔치며 국수 꼬랑지 구워 먹고

저 하늘 별들은 손칼국수 국물에 반짝반짝 빛나는 양념 듬뿍 뿌리며

옹기종기 모여 앉은 한여름 밤, 저녁은 별미겠다

 

 


 

김욱진 시인

1958년 경북 문경에서 출생. 경북대 사회학과 및 同 대학원 졸업. 2003년 《시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비슬산 사계』 『행복 채널』 『참, 조용한 혁명』 『수상한 시국』과  2020년 전 세계 시인들의 코로나19 공동 시집 『地球にステイ(지구에 머물다)』가 있음. 2018년 제 49회 한민족통일문예제전 우수상 수상. 2020년 아르코문학창작기금 수혜. 한국문인협회 달성지부 회장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