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환 시인 / 가로등
기다림이 쌓여 가로등 하나 서 있다 기다림보다 길고 기다림보다 강한 가로등 하나 그 밑엔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다 등불이 내려 몇 십년 기다려 왔던 것이 또 몇 천년 기다려 갈 것을 충혈된 눈동자로 비춘다 세월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쓰린 세월은 더욱 쓰라리고 아픔 보이지 않는다 가로등 하나 그 밑에 아아 평생이 보일 뿐이다 가로등 하나 서 있다 그 밖엔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다
김정환 시인 / 제설작업
살아도 오히려 힘에 또 겨울 벅찬 아픔과 감동의 시대였니라 연병장에 엄청나게 쌓인 눈산더미를 보며 일요일 제설작업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넉가래를 밀면 우리 힘만으로는 암만해도 모자랄 것 같은 눈은 지금도 쌓이며 넉가래 끝에서 묵직한 사랑의 감동이다 시력만으로는 감당하지 못할 하얀 반짝임. 눈물. 살아도 내사 다는 못 살고 돌아갈 시대 80년대까지 이렇게 산사태로 밀려오는 눈을 치면서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죽어도 밀어도 밀어도 80년대까지 밀려드는 눈은 우리 자라다 만 키의 어깨를 넘칠 듯, 넘칠 듯 우리 서툰 넉가래질을 덮쳐 삼킬 듯, 그러나 눈발 속에서 아이가 운다 배가 고파서 살려주셔요 소리같이 그러나 이대로 물러서지 마셔요 소리같이 윙윙대는 눈보라 현수막 흩날리는 전쟁구호 뒤에 저희들이 있다는 듯이 은 아직도 쌓이고, 넉가래질은 서툴고 땀에 흐려진 시야 주먹으로 닦아내면 담벼락에 엉겨붙은 하얀 잔설 풍경엔 핏자국이 묻어 있다 아름다움엔 피와 살기가 묻어 있다 온통 하얘지는 세상에 일렬종대 그대는 아직도 고통에 갇혀 지내고 연병장에 쌓인 눈을 밀면서 생각한다 우리가 우리로 살아 남은 것은 우리의 앞이 무언가를 했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안 했기 때문이 아니다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박재삼 시인 / 12월 외 1편 (0) | 2023.02.26 |
---|---|
권덕하 시인 / 시詩 외 1편 (0) | 2023.02.26 |
신대철 시인 / 분꽃씨 외 1편 (0) | 2023.02.26 |
구상 시인 / 부활절 외 1편 (0) | 2023.02.25 |
김욱진 시인 / 보리밥 외 1편 (0) | 2023.02.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