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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태관 시인 / 단풍나무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4. 2.

이태관 시인 / 단풍나무

 

모두들 한잔 걸쳤을 거다

자정이 가까워오는 시간 전화벨이 울리면

보나마나 선호다

ㅡ형, 근데 말이지

빙빙돈다 바람이 살며시 몸을 흔들면

떠날 차례야

이륙하는 프로펠러 씨앗들

멀리 가야 안전하다

살아남을 확률이 높다

낯선 도시의 바람은 차다

ㅡ형, 근데 말이지 이곳이 아닌가봐

ㅡ혀엉, 근데 말이지 여기가 어디야?

수화기 너머로 찬바람이 든다

선호야, 문 좀 닫아라

층계를 지날 때마다

붉은 센서등 켜졌다, 꺼진다

병원 앞, 단풍나무

날아간다 단풍나무

자정이 지난 시간, 전화벨이 울린다

-행님요, 그런데 말이죠

 

 


 

 

이태관 시인 / 김지미와 태현실, 엄앵란을 이야기하다

 

나무와 나무가 모여 숲을 이룬다

그들의 노래는 각기 다르고 사연도 많다

오리나무는 오리伍里마다 심었던 나무고

(혹, 오리가 앉았던 나무인지 모른다)

소나무는 소를 매었던 나무다

(솔잎 사이로 바람 지나는 소리 소- 소― 하였는지도)

단단한 밤을 지새우는 밤나무

자작자작 타는 자작나무의 생들이 모여

숲이 된다

그 죽음의 하나가 숯이라면

어쩌면 소소한 이야기

숯에 얹어진 오리가 십리를 가는 사이,

술상 앞에 모인 이들의 머리가 반백이다

어느새, 그 숲 사이로 가을이 지나고 있다

 

 


 

 

이태관 시인 / 나무

 

나무에 대해 생각합니다

한 생이

나,

무입니다

 

 


 

 

이태관 시인 / 징글 벨

- 구상나무

 

눈 내리는 저녁은 가로등도 따뜻하지

아이들이 돌아간 놀이터

귀가를 서두른 자동차에도

눈은 아낌없이 나려

산타가 오실까

지금쯤 네 선물을 고르고 계실 거야

언제쯤 오실까

퇴근 시간이라 길이 좀 막혀

오랫동안 내리는 눈을 바라본다

그 작은 눈들이 내 머리 위에 쌓여

괜찮아 괜찮아 울어준다면

그 눈물 굴려 대문 앞에 세워두고

당신의 늦은 귀가를 기다릴 거다

얼굴 한 가득 웃음을 그려두고

거실 불 환히 밝혀 겨울잠에 든

다람쥐들이

뭔 일이랴 두 눈 치켜뜨도록

뒷산을 배경으로 당신을 위한

멋진 트리 하나를 완성할 거다

눈과 눈이 마주치는 거리에

초인종 하나 걸어두고

 

 


 

이태관 시인

1964년 대전에서 출생. 1990년 《대전일보》신춘문예 당선. 1994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시집으로 시집으로 『저리도 붉은 기억』(천년의시작, 2003)과 『사이에서 서성이다』 (문학의전당, 2010) 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