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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지헌 시인 / 백두산 천지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4. 2.

김지헌 시인 / 백두산 천지

 

 

장엄 벼랑을 오른다

고구려의 혼이 서리고 여진. 거란. 말갈이

신단수로 섬기며 봉화 올리던 민족의 시원

 

불의 가슴으로 물을 품은 채

장군봉. 천문봉. 용문봉 봉우리 봉우리

아득히 먼 옛날부터 초원을 내달려온

근육질의 백두 봉우리들

큰 바람이 산맥을 한번 휘돌더니 남녘으로 휘장을 친다

 

어여 오너라

가슴 열어 젖 물리는 어미처럼

메마른 대지를 적시며

압록과 두만으로 뿌리 뻗고 있구나

숨을 골고루 나누고 있었구나

사스레나무 수 만 년

쓰러질듯 어깨동무하며 이 땅 지켜왔구나

 

두메자운. 담자리꽃. 금매화. 하늘매발톱

가장 낮은 자리에서 아라리 아라리요

뿌리 내리고 있었구나

신의 눈동자 천지로부터

태초의 두루마리에 이 땅의 이야기들을 받아 적고 있었구나

하늘이 땅이 인간이 모두 하나 되어 있구나

 

 


 

 

김지헌 시인 / 움

 

 

흙 속에 묻어두었던 뿌리가

죽을 힘 다해 움을 틔워낼 때

그 움이라는 말

 

맵차던 지난겨울

스티로폼 박스에 갈무리 해 놓았던 대파

그 하얗고 탱탱한 속살에서 뻗어 나온 줄기가

맵고 아리던 생의 기억 숨긴 채

샛노란 새싹 움 틔울 때

세상에 대하여 단단히 채비한 게 분명한 게다

 

움이라는 말

뱃속의 아기가 첫울음으로 우렁차게 문 열어젖히듯

어느 날 노란 대파 줄기 쑥 올라올 때

움이라는 말은 얼마나 힘이 세든가

봄의 움은 태양의 힘으로 자라지만

겨울 움파는 묵은해의 기운으로 자란다

추운 겨울을 버티는 힘이란

묵은 뿌리에서부터 오는 것

매운 성깔로 세상을 당차게 밀고 갈 수 있는 것

움딸, 움쌀, 움집, 움짤, 움트다……,

존재만으로도 소소하고 따뜻한

움이라는 말

 

 


 

김지헌 시인

1956년 충남 강경에서 출생. 수도여자사범대학 과학교육과 졸업. 1997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다음 마을로 가는 길』 『회중시계』 『황금빛 가창오리 떼』 『배롱나무 사원』. 제13회 미네르바 문학상 수상. 한국시인협회 사무총장으로 재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