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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정원 시인(이천) / 불후의 명소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4. 3.

이정원 시인(이천) / 불후의 명소

 

숨겨야 할 샅 같은

좁다란 뒤란

점묘화로 핀다

 

질문이 답보다 많아 구부러진 집

해의 기울기가

점성(粘性)의 집 처마에서 높아졌다, 낮아졌다

궁색한 질문이 나뭇가리 틈에서 몸집을 불리는

문패의 뒤쪽 우멍한 뒤란

 

지나간 날들의 안부는 모두 뒤란에게 묻는다

 

침 발라 꾹꾹 눌러쓴 일기장 넘기면 불거져 나오는 누추한 페이지

희망은 접히고 절망은 꽃피고

 

엄마의 눈물이 뒤란에서 고욤처럼 굴러다녔지

그 눈물을 찍어 바른 분꽃들 어룽어룽 저녁을 흔들어

불어터진 칼국수 양푼에 노을꽃 다발로 졌지

 

아버진 이슥토록 먼 별

 

말랑한 밤의 속뼈 우려

장독들이 침묵을 엿처럼 고며 깊어갈 때

아버지 노랫소리 거나한 틈 비집고

여투어 둔 울음 때맞춰 퍼내는 소쩍새 목이 쉴 무렵

 

고독이

파란의 밤을 데리고 나동그라지던 뒤란

 

호롱불 한 줄기 기어 나와 새벽에 기대 바래던 곳

 

한 가계의 뼈대가 낡은 우산살처럼 어긋나도록

내색도 없이 조용조용 늙어간

아직도 질문의 괄호 안 우물처럼 깊은

유서 깊은 명소

 

두고 온 것 많아 저릿저릿, 푸르다

- 시집 『몽유의 북쪽』에서

 

 


 

 

이정원 시인(이천) / 산방꽃차례로 피는

 

 

장딴지 굵어지고 발가락이 자라

나비코고무신은 터질 듯 부풀었지

 

새 신을 사 줘,

조바심 마르던 날들이 베란다에 걸터앉았네

 

더는 발 뻗을 데 없다고 수국 이파리가 뾰로통

 

새 신발 신기려 발을 빼 보니 오갈 데 없는 뿌리들이

혈맥 그물 촘촘히 생장점을 붙들고 있네

 

얽히고설킨 흙의 궤도 따라

자전(自傳)의 바퀴 굴려 혈맥 그물을 엮고 있네

아홉 살 내 발가락처럼 엉켜

 

아직도 코고무신 속 내 발가락은 나비잠을 자네

아무도 꺼내 주지 않아

헛꽃의 시간이 길어지네 발바닥 가득 뿌리만 자라네

 

뿌리가 걸어간 거리까지 한사코 따라가 터뜨릴

산방꽃차례의

가지런한 웃음은 피멍울인가

 

용천혈 쓰다듬듯

조심스레 수국 뿌리를 들어내면

 

계절 흘리지 말라고 비닐 망 한쪽

새소리 발효시키라고 배양토 조금

빗물 받아 안으라고 마사토를

 

수국꽃 필 때까지 넌지시 놓아두면

수슬수슬 상처 같은 수다가 피지

 

화분 발치에 앵두나무가 햇빛 그물 펼치는 동안

고집을 키우던 내 발뒤꿈치 물집도 말라

나비코고무신 벗어 던지고 가문 발가락을 꺼내네

 

새 운동화 속 치수 늘인 발바닥에서

하얗게 날개 접고 있던 고요가

아홉 살 꽃봉오리를 야금야금 꺼내고

 

마음의 키 휘영청 산방꽃차례로 솟고

 

- 시집 『몽유의 북쪽』에서

 

 


 

이정원 시인(이천)

경기도 이천에서 출생. 인천교육대학 졸업. 2002년 《불교신문》 신춘문예, 2005년 계간 《시작》으로 등단. 2009년 문예진흥기금과 경기도 창작지원금 수혜. 시집으로 『내 영혼 21그램』(천년의시작, 2009), 과 『꽃의 복화술』(천년의시작, 2014)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