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호 시인 / 어떤 절규
양재천변으로 봄놀이 가는 길 붉은 햇살이 쏟아져 내린다 한 이방인이 길가던 꼬부랑 할매 부여잡고? 소리치며 중얼거린다 "우리 어머니, 딸 열을 낳았는데 내가 여덟째라오" "우리 어머니, 딸 열을 낳았는데 내가 여덟째라오" 그 쉰 목소리 꽝꽝 울려 퍼진다 나는 깊은 침묵 속에 빠진다 그냥 먼 산만 바라보던 할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지팡이 짚고 가던 길 가고 있다 그 이방인 어느새 온데간데없다 그 목소리 귓전에 끝없이 맴돈다 이 먹먹한 봄날, 나도 낯선 할매 뜨겁게 부둥켜 안고 실성한 사람처럼 목 터지게 소리치고 싶다 "우리 어머니, 자식 넷을 낳았는데 내가 셋째라오“
장성호 시인 / 나는 오랫동안 바라만 보았다
꽃피는 봄날에 보자기 둘러씌운 채 낯선 집에 들어온 흰 호접란, 새색시처럼 수줍음 타며 임 위해 나비춤을 춘다 외로울 땐 말동무 되어준다 헤일 수 없는 나날들, 그녀만 바라보며 살겠다고 뜨거운 입술로 굳게 언약한다 어느 날 은은한 향을 내뿜는 풍란이 떡 하니 안방 차지하자 얼굴 뽀얗게 분 바르고 임만 바라보던 저기 나비 부인, 바람칼로 제 목숨을 뚝뚝 끊고 찬 바닥에 우우 떨어진다 잘린 꽃대 옆 곁가지마다 어린 꽃망울 남겨놓고 그날, 나는 오랫동안 바라만 보았다
마을버스 정류장 푸른 벤치에 슬픈 늑대 한 마리 침 흘리며 누워 있다 숨소리 가늘게 들린다 햇살 무늬 박히는데 입때껏 인간으로 변하지 못하고 있다 대 보름달 뜬 지난밤 컹컹 짖으며 먹이 찾아 잃어버린 가족 찾아 골목길을 뒤지고 다녔을 게다 깊은 눈꺼풀 축 늘어져 있고 날카로운 이빨도 닳아버린 저기 덥수룩한 늑대 인간, 파도처럼 요동치는 숨결 꼬르륵꼬르륵 숨 넘어가는 소리 귓전에 꽝꽝 울린다 그저, 나는 오랫동안 바라만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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