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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윤인미 시인 / 그 여자의 기억법, 북극성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4. 3.

윤인미 시인 / 그 여자의 기억법, 북극성

 

 

 당신은 빙산을 녹이는 심정으로 여기까지 왔네요. 앞으로도 당신 자신을 구하러 올 걸 알아요. 바람이 산불을 막지 못하듯 당신 탓이 아니에요. 기억을 벗어난 지 이미 오래되었어요. 한때 빛났던 이름은 더는 묻지 않을게요. 왔던 길을 낯설게 돌아가는 무량한 경술(庚戌)생 중 당신은 한 명이지만, 하늘 아래 몸을 던져 구했던 마른 입술 같은 조급한 그 땅을 기억해요. 없는 것으로 없는 것을 가리키며 설명하지 않아도 그 마음 알아요. 그만하면 됐어요. 물비늘로 반짝이다가, 바람으로 흘러가세요. 점점 예뻐지는 나뭇잎처럼 발을 동동 구르며 저는 항상 여기 있을게요.

 

 


 

 

윤인미 시인 / 물은 물 밖에서 꼬리가 잡힌다

 

 

 뒤를 캐다가 앞을 잊었어요 앞을 믿지 않으니 몸이 꼼짝하지 않네요 존재했다는 사실이 달력처럼 쉽게 뜯겼어요 얼굴을 지키기 어려워요 성별에 갇힌 성처럼 지루해요 처음부터 그랬다고 애써서 확신에 갇히고 애쓰지 않아 확신이 절실해요 돌이킬 꿈이 없어요 단독으로 입장을 밝히는 달빛이나 무리 지어 입장을 밝히는 별빛만큼 현재의 입장을 밝혀야 해요 그러나 아무것도 밝힐 수 없네요 산도를 빠져나오고 있는 아이의 머리처럼 불리해요 트라우마가 원동력인 삶처럼 더없이 지극해요 이제 포기할 수 없는 자성自性만 남았네요 믿고 보호받을 수 있는 과거가 필요해요 뒤를 캐다가 뒤를 밟혔어요

 

-시집, 『채널링』, 시와반시, 2020 에서

 

 


 

윤인미 시인

1970년 경기 수원 출생. 단국대 영문과 졸업. 2013년 《시와 미학》으로 등단. 시집 『물의 가면 』, 『채널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