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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혜연 시인 / 고인돌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4. 3.

박혜연 시인 / 고인돌

 

 

당신의 집이 좋아

창문 하나 없는 벽에 귀 기울이면

이야기 소리 들려오는

 

울타리도 없고

대문도 없고

커다란 지붕만 하나 얹은 당신의 집

 

오랜 세월 고요한 이끼에 싸인

당신의 집에 기대면

 

청동거울에 비친 하늘이 쨍하고 반짝이는 소리

민무늬항아리에 차르륵 곡식낟알 쏟아지는 소리

돌화살촉이 들판을 가르며 바람을 일으키는 소리

 

하늘과 강, 들판의 소리들이

울타리 없는 당신의 집으로 속속 들어가 앉아

글자 없는 이야기책을 만들었는지 몰라

 

삶과 죽음을 한 몸에 품던 동검의 날이 비파형으로 잠든 곳

돌을 떼어 쓰는 일상이 역사가 되어 웅장한 지붕이 된 곳

 

켜켜이 쌓인 이야기들이

너무 가볍지 않게 너무 무겁지 않게

등을 내주는 당신의 집

 

들판을 마당으로 끌어들여

누구라도 잠시

이야기를 듣고 갈 수 있는,

 

여기 산수리 신대마을 왕바위재에 터를 잡은

당신의 집에는

지금도 작가미상의 이야기들이 하루종일 새어나오고 있어

 

- 시집 <어떤 이유>에서

 

 


 

 

박혜연 시인 / 작심 게장

 

 

게장 백반을 먹으러 가는 길에 ‘작심 독서실’ 간판을 보면서 우리들 ‘작심삼일’이 생각나 한참을 웃었다

작심삼일作心三日,

저 이름을 거리에 건 이는 누구일까

마음을 단단히 먹는 일이 얼마나 어려우면 유효기간이 삼일일까를 생각하며 작심에 대해 우리는 작심한 듯 열변을 토했다

 

밥상 위 간장게장은 작심하고 우리 앞에 딱지를 벌리고 누웠다

거친 바다를 몸으로 막아내던 그 딱딱한 등딱지를 얇게 삭혀 내린 간장게장에서 작심한 듯 짭조름한 향이 났다

 

마음 단단히 먹고 덤벼야 하는 세상이라면 아무래도 나는 백전백패 단 한 번의 승리도 없을 것이다 돌아서면 금방 물렁해지는 마음 안쪽, 나도 작심하고 나를 다 내려놓을 것이다

 

물렁해지지 않으면 스며들지 못하는 세상, 물컹물컹 건너다보니 한 세월이 다 건너간다

 

제 살과 껍질 내려놓은 간장게장 작심이 입맛을 돋우는 저녁, 물러지지 않고는 서로에게 닿을 수 없는 마음과 마음,

그렇게 한 세상 저물어도 좋겠다

 

- 시집 <어떤 이유>에서

 

 


 

박혜연 시인

1968년 전남 승주에서 출생. 순천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1993년 《시대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붉은활주로』(리토피아, 2014), 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