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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주대 시인 / 빈집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4. 3.

김주대 시인 / 빈집

 

 

허공에 그어놓은 거미의 영토에 깨알 같은

주검들 나부끼는 곳

기억을 더듬으며 걸어간 덩굴풀

무성한 마당 가로질러 그도 다녀갔는지

부서진 문이 열린다

 

건너편 깨진 유리창으로 들어온 햇살이

먼지 같은 손을 내밀고

처마 끝에서 풀썩,도둑고양이가 떨어진다

거미가 머리를 들고 제 몸을 토하는 집

혼자 운다

 

허공의 한 점에 눈길을 풀다

움켜쥐고 온 시간을 내려놓으면

노을 지던 들판처럼 마음이 젖는다

뒷모습으로만 걷던 날들

아직 도달하지 못한 곳에 서 있다

바람과 달빛이 다녀가는 몸

노랑제비꽃 봄망초 장다리꽃 유언들

우리 그만 사랑하자고 내달리던 시절

농약병처럼 뒹군다

 

나는 빈집

남은 삶도 오래 빈집일거라고

도달하지 못한 내 안을 곧 도달할 것처럼 걷는다

도둑고양이처럼 얼굴에 떨어지는 기억으로

버리고 온 가족들의 빈집

 

<시작 16년 가을호>

 

 


 

 

김주대 시인 / 숲

 

 

투명한 잎맥을 따라 잎잎이 푸른 뼈가 서 있다.

등골이 시릴 만큼 푸른 피가 출렁이는 숲속에 앉아

숲의 숨소리를 들었다

키 큰 나무들이 하늘을 향해 기다란 손을 내밀어

햇살을 잡아당긴다

나무의 웃음소리에 우듬지가 흔들릴때

푸른 잎맥을 따라 번지는 숲의 피는

눈과 심장과 말까지 푸르게 하였다

우리들 입에서는 푸른 단어들이 낭자했다

이 숲의 푸른 짐승들은 여름을 뜨겁게 살다가

죽어 바람이 되었을 것이다

천년 전의 바람이 아직도 숲을 떠나지 않고

투명한 잎맥 속을 뛰어다닌다

이 숲의 푸른 새소리는 죽어 숲의 뿌리로 가서

긴 겨울을 지냈을 것이다

물관부를 따라 나뭇가지 끝으로 올라가

푸른 잎으로 매달린다

바람이 불면 나뭇잎들이 푸른 새소리를 내는 이유였다

우리가 숲에서 죽으면 자정이 지나도

집으로 돌아가지 않아도 되겠다

우듬지에 바람처럼 흔들리다가

푸른 피의 숲으로 천년을 살아도 되겠다

십만년 전 어느 원시인 부부가

푸른 짐승을 쫓다가 잠든 곳에서

또 잠들어도 좋겠다

그러면 우리는 십만년 뒤에

새소리나 바람 소리로 잎잎이 피어날 것이다

 

《그리움의 넓이》창비.2012

 

 


 

김주대 시인

1965년, 경북 상주에서 출생. 성균관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1989년 《민중시》, 1991년《창작과 비평》으로 작품활동 시작. 시집으로 『도화동 사십계단』 『그대가 정말 이별을 원한다면 이토록 오래 수화기를 붙들고 울 리가 없다』 『꽃이 너를 지운다』 『나쁜, 사랑을 하다』 『그리움의 넓이』 『꽃이 져도 오시라』가 있음. 2013.11. 제26회 성균문학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