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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용헌 시인 / 점자로 기록한 천문서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4. 3.

이용헌 시인 / 점자로 기록한 천문서

 

 

푸르디푸른 종이는 구겨지지 않는다

구겨지지 않으면 종이가 아니다

구겨지지도 않고 접혀지지도 않는 것이

하늘에 펼쳐져 있다

새들은 시간을 가로질러 나는 법을 모른다

아무도 새들에게 천문을 가르치지 않는다

아는 것이 없으므로 나는 것도 자유롭다

읽을 수 없는 서책이 하늘에 가득하다

종이도 아닌 것이 필묵도 아닌 것이

사계를 편찬하고 우주를 기록한다

누가 하늘 끝에 별들을 식자해놓았나

최고의 천문서는 점자로 기록되었을 것이다

가장 멀고 깊은 것은 마음 밖에 있는 것

나는 어둠을 더듬어 당신을 읽는다

당신의 푸르디푸른 눈빛을 뚫어야만

구김살 없는 죽음에 도달하리라

이 무람한 천기를 아는 듯 모르는 듯

새들은 밤에도 점자를 남기며 날아간다

 

 


 

 

이용헌 시인 / 바다의 문장

 

 

 'ㅡ' 모음 하나뿐인 속초 앞바다가 진종일 시를 쓰고 있네. 수평선 가득 떠도는 비문을 처얼썩철썩 후려치며 온몸으로 시를 쓰고 있네. 달랑 남은 백사장 위에 천 번도 더 썼다 지우는 시, 밀었다 두드렸다 밤새 퇴고를 해도 끝내 한 행을 넘지 못하네. 'ㅡ'아득도 하다는 듯 'ㅡ' 깊기도 하다는 듯, 달빛은 자꾸 허연 지우개 가루를 뱉어내네. 철퍼덕철퍼덕 앉았다 누웠다 파도는 빈 종이만 구겨 던지네. 생각하매 나 태어난 생의 바다도 'ㅡ'모음 하나였네. 'ㅡ' 모음으로 누워 젖을 빨고 'ㅡ'모음 하나로 옹알이를 하였네. 모음에 자음을 더하거나 자음에 모음을 더하기까지는 무수한 입술들이 스쳐갔네.

 행과 행을 넘어 행간을 짚기까지는 아직도 숱한 눈과 귀를 훔쳐야 하네. 태초의 문장은 모음 하나, 속초 앞바다가 온몸으로 태초의 말씀을 풀고 계시네. 까마득한 수평선 위로 낯익은 자음들이 날이가네.

 


 

 

이용헌 시인 / 너의 나무였다

 

 

하늘 아래 와지직 찌그러지고 싶을 때가 있다

단 한 번 너에게 몸을 허락하고

무참히 던져져버리도 싶을 때가 있다

물을 담으며 물이 되고 술을 담으면 술이 되고

내 온전히 네 것으로 되는 길은 아득하나

뜨거우면 뜨거운 대로 차가우면 차가운 대로

꼭 한 번 몸을 열어 촉촉해지고 싶은 날이 있다

처음부터 나의 생은

네 목울대 근철 서성이는 목마른 나무였거나

차마 혀와 입술로 해갈하지 못한

또 다른 고백을 받아 적는 순백의 종이였거나

수천수만의 꿈 잘리고 말리다가

끝내는 마음까지 척, 비어버린 종이컵이 되었다

알아?

단지 네 입술이 몸에 닿는 순간 미련 없이 열반하는 나

 

-시집 <점자로 기록한 천문서>에서

 

 


 

이용헌 시인

1959년 광주에서 출생. 한국방송통신대  국문학과 졸업.2007년 《내일을 여는 작가》 신인상을 통해 등단. 한국작가회의 회원. 시작 시인선 <점자로 기록한 천문서>. 도서출판 돋을볕 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