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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선락 시인 / 빗변이 있는, 카페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4. 21.

이선락 시인 / 빗변이 있는, 카페

 

 

그를 펼쳤는데, 수학 시험지였다

문제들이 벽에 얼비쳤다.

 

이마를 짚었더니 딱딱했다 반 이상이 벽 속에 빨려든 후였고

마주앉아 커피를 마시면 주르르 흘러내렸다

 

블랙커피를 쏟았고 입술을 데었고, 발목이 삼각형에 빠지고.

 

빗변이 거칠군요 내가

높이가 납작하죠 그가

 

벽 속에서 삼각형들이 일어서고 있었다 밖으로 쏟아지는 예각들

머그잔에 각설탕 몇 조각을 더 넣었다

 

혈압이 오른 탓일까, 발등에 정맥류들 불거지고

나는 커피에 프림 한 스푼을 더 탔고, 블랙은 브라운이 되었고

 

삼각함수는 빗변 쪽으로 휘어지고 있었다 무한급수 쪽으로 기울다가

복소수의 값을 취하다가

 

나는 여집합인지 공집합인지, 프림만 한 스푼 또 넣어 저었다

 

 

수학 시험은 늘 그랬다 답이 생겨나지 못했다 빗변을 누르면 예각 더 날카로워지고 각을 뭉그리면 밀크커피 맛이었다 미끈거리고, 쓰고, 달고

 

토할 뻔했다 i = -1이라 쓰고 있는데

 

B가 시험지를 거둬갔다. 비가 억수같이 내렸고

 

-문학동네 2022. 여름호

 

 


 

 

이선락 시인 / 옆구리 사용설명서

통째 얼어버렸을 땐 손을 떼세요 부서져 내릴 수 있어요

돋보기를 갖다 대보세요

돋보기 속의 계절엔 늘 새가 날아가는 장면이 있다 무작위로

울고 웃는다

테두리 밖으로 삐져나간 깃을 구부려준다 흰 탄력으로 내가 울고, 웃는다

가장자리가 기울어지면 눈을 옴츠린다

유령개미만 한 네가 울고, 웃는다

가장자리는 자주 깨져요, 너는 안 해도 될 말을 고른다

목줄을 쥔 네가 지나가고 목줄에 꿴 나, 반대방향으로 기운다

고양이 눈으로 째려보면 돋보기 속은 못이 박혀 있다

볼록면을 닦는다 물휴지엔 숨소리 묻어난다

옆구리에 박힌 못 때문일까 고양이 사라지고, 멍

무슨 문장이 이 모양이야, 뱉으면 오후 네 시의 햇살

엉킨 개미들 읽힌다 발가락이 부은

개미들 흩어지고, 지문도 남지 않은 문장 속엔 옆구리 눌린 글씨 두엇

햇살 쪽으로 쏠리고

가장자리, 또 비를 맞는다 돋보기 속으론 여름 막 지나가고

그래요, 옆구리 쪽으론 무언가 지나가요

잘록한 글씨들흘러내리는, 계절

돋보기 따위……, 눈빛을 접으면 숨소리 가라앉고

흘러내린 얼굴을 읽으면 부풀었던 입술 비틀린다

저런, 서늘한 곳에 뚜껑을 열어두지…… 그랬……사레들린

돋보기 속에서도 몇 년이나 견뎠잖아 지난주에도 손가락 빤 적 있지?

목소릴 편다

죽지도 않을거면서 악을 쓰면 어떡해, 배고프잖아, 가장자리에 묻은 목소리를 끌어당긴다

아래턱이 접힌다 아니, 찢어진다

....

찢어진 비닐봉지에서 턱이 접힌 i가 옆구릴 내밀었다

저 아직 미혼인데요, 아침은 늘 건너뛰어요. 속엣말을 비틀며

찢어진 페이지를 뜯어낸다 파쇄기에 밀어 넣고, 찬물을 붓는다 i, 젖을까?

돋보기 속의 문장은 자꾸 부풀어 오르는 버릇이 있어요

동그라민 자꾸 물만 먹죠 얼어버리기도 하고

​​

보세요 저 i, 날 잃어버린

i²=-1

 

 


 

이선락 시인

1957년 경북 경주에서 출생. 건국대 수의과대학 졸업(수의사). 2022년 《서울신문》신춘문예 당선. 현재 동리목월 문예창직학과 재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