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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태경 시인 / 액체 괴물의 탄생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4. 22.

김태경 시인 / 액체 괴물의 탄생

 

 

우리 같이 놀이 할까

마술 혹은,

마법 같은

나에게는 평등하고 당신에겐 불평등한

 

단 하루 약속된다면

바라보기만 하는 놀이

 

감췄던 루시퍼는 다락방에 남겨둔 채

그냥 마냥 경계 없는

눈싸움 말고

눈 맞춤

 

멈췄던 지난날들이

눈길에 녹는 놀이

 

말을 참는 당신 눈에 웃음꽃이 흐드러져

아주 오래 꽃잎 따서

머리 위로 뿌려볼까

 

유리가 흘러내리고

액체 괴물로 변하는 놀이

 

시집 『액체 괴물의 탄생』(시인동네, 2022) 수록

 

 


 

 

김태경 시인 / 별빛의 말

 

 

슬픔의 친구들은 몇 호에 살고 있을까?

 

유리 아파트는 사계절이 겨울이었다

 

오늘도 유리된 사람이

몸의 불을 끄고 있다

 

별빛은 모음으로 이루어진 독백이다

 

네게 가면 독백은 고백처럼 환해진다

 

별빛은 36.5도

말에는 온기가 돈다

 

별빛이 다치고 닫힌 유리문을 통과한다

 

안부는 누군가의 혼잣말을 눈 뜨게 하고

 

차갑던 슬픔의 파편도

별이 되어 흩어진다

 

시집 『액체 괴물의 탄생』(시인동네, 2022) 수록

 

 


 

 

김태경 시인 / 동강할미꽃의 재봉틀

 

 

솜 죽은 핫이불에 멀건 햇빛 송그린다

골다공증 무릎에도 바람이 들이치고

재봉틀 굵은 바늘이 정오쯤에 멈춰있다

 

문 밖의 보일러는 고드름만 키워내고

숄 두른 굽은 어깨 한 평짜리 가슴으로

발틀에 하루를 걸고 지난 시간 짜깁는다

 

신용불량 최고장에 묻어오는 아들 소식

호강살이 그 약속이 귓전에 맴돌 때는

자리끼 얼음마저도 뜨겁게 끓어올랐다

 

감치듯 휘갑치듯 박음질로 여는 세밑

산타처럼 찾아주는 자원봉사 도시락에

그래도 풀 향기 실은 봄은 오고 있겠다

 

201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조부문 당선시

 

 


 

김태경 시인

서울에서 출생. 2014년 ≪열린시학≫ 평론 등단, 201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조부문 당선. 시집 『액체 괴물의 탄생』과 평론집『숲과 기억』이 있음. 현재웹진 『시인광장』 편집위원이며,〈객〉 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