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종기 시인 / 파타고니아의 양
거친 들판에 흐린 하늘 몇 개만 떠 있었어. 내가 사랑을 느끼지 못한다 해도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것만은 믿어보라고 했지? 그래도 굶주린 콘도르는 칼바람같이 살아 있는 양들의 눈을 빼먹고, 나는 장님이 된 양을 통째로 구워 며칠째 먹었다.
어금니 두 개뿐, 양들은 아예 윗니가 없다. 열 살이 넘으면 아랫니마저 차츰 닳아 없어지고
가시보다 드센 파타고니아 들풀을 먹을 수 없어 잇몸으로 피 흘리다 먹기를 포기하고 죽는 양들.
사랑이 어딘가에 존재할 것이라고 믿으면 혹시 파타고니아의 하늘은 하루쯤 환한 몸을 열어줄까? 짐승 타는 냄새로 추운 벌판은 침묵보다 살벌해지고 올려다 볼 별 하나 없이 아픈 상처만 덧나고 있다. 남미의 남쪽 변경에서 만난 양들은 계속 죽기만 해서 나는 아직도 숨겨온 내 이야기를 시작하지 못했다.
-시집 <하늘의 맨살>, 2010, 문학과지성사
마종기 시인 / 혼자
소아시아의 터키 땅, 신약성서의 에페소 도시를 여행하면서 초대 교회의 전교와 박해와 지진을 느끼는 발걸음, 완전 폐허가 된 옛날 도시에서 사도 바울의 열띤 음성을 듣다가, 보석상이 많았던 번화가를 지나 창녀 집으로 들어가던 버려진 골목도 기웃거려보고, 한 나절 빈 도시를 가로질러 뒤쪽 성문을 빠져 나오면, 이천 년의 비감하게 웅장한 모습 삽시에 사라지고, 가난한 촌 바닥 싸구려 노점 장터가 줄 서서, 먼지 쌓인 기념품들을 팔고 있었다. 무더기로 몰려오는 호객의 아우성 피해 잠시 혼란해진 내게, 바짝 다가오는 소년, 피난 시절 신문팔이 하던 어린 내가 보였다.
- 유 코리안? 유 자빠니이즈? 내가 코리안이던가, 그래 내가 코리안이다.
- 컴, 마이 머더 코리안! 마이 머더 코리안! 얼결에 따라간 천막 노점상 안 늦삼십대의 초라한 한국 여인이 머리 숙인다.
- 한국 분? - 네.
- 반갑습니다. - 네.
- 여긴 얼마나?- 한 십 오 년…….
- 이 근처엔 딴 한국 분도? - 혼자…….
- 혼자뿐이세요?(이 먼지 속에!)
- 네…….
- 나도 딴 나라에서 산 지가 20년 넘었어요.
- 아, 네. 20년…….피곤한 당신 눈 속에 쌓인 딴 나라의 먼지.
근처를 빙빙 도는 터키인 남편에게 눈치 보여, 만국기 가슴판에 붙여놓은 싸구려 셔츠 한 뭉치 사고, 득의만면 나를 올려보는 소년에게서도, 뿔피리 몇 개 사주고 황망히 떠날 준비를 한다. 잘 사세요. - 네, 안녕히 가세요. 터키 땅에까지 와서도 우리들의 인사는 안녕히 가라는 것이구나. 보퉁이를 들고 관광버스에 올라탄다. 백인들 판에 노란 한 점. 맨발의 소년이 길거리에 서서 손을 흔들어 주며 웃는다. 다시 창 밖을 본다. 소년은 그새 없어지고 빗방울이 차창을 때리기 시작한다. 혼자뿐이라고? 바보! 혼자…… 문득 무진한 갈대밭이 된 에페소의 성 밖으로, 가는 비 맞으며 혼자 걸어가는, 내가 좋아하는 하느님.
-시집 <이슬의 눈> 1997. 문학과지성사
마종기 시인 / 우화의 강 寓話의 江 2 - 황동규에게
싸구려 유행가처럼 흥얼거려온 체코 나라 스메타나의 "몰다우강"이 오늘은 강물이 되어 몸을 적신다. 외국에 오래 나와 살던 작곡가는 귀가 멀고, 늙고 그리운 고향 노래가 나를 적신다.
동구라파의 수도 프라하를 가로지르는 노래. "몰다우강", 혹은 블타바강은 엘베로 합치고 한강은 서울을 거쳐 서해로 합치고 교향시곡 "내 조국" 중에서도 빠른 물결이 안개 자욱한 이 나라의 새벽을 깨우고 있다.
촌놈 같은 작곡가는 외국에서만 대접받고 제 나라에 돌아오면 언제나 외면당했다지. 19세기였지만, 멀리 떨어져 살아보지 않고는 "내 조국" 이라는 제목을 선뜻 붙이기는 힘들었겠지. 고구려와 신라와 백제 사람들의 혼령을 전철 타고 출근하는 친구들에게 보여주려면 맑은 계곡을 거쳐 수석을 다듬어내는 손길로 그 강의 이름을 불러줄밖에 없겠지.
중학교 때 같이 휘파람 불던 친구에게 갑자기 내가 다시 "몰다우강"이 좋아졌다면 어이없어 어깨를 치며 웃고 말겠지만 웃어도 아름다운 강물은 끝없이 흘러라. 어차피 작은 마을 돌아가는 한강의 지류는 내게는 이제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는다.
작곡가는 너무 늙어서 귀가 다 먼 뒤에야 기억의 물소리들을 모아 "몰다우강"을 만들고 수천 년 같이 흐르던 강물의 혼령이 되어 고국의 긴 꿈속에서 깨어나지 않는구나.
(고국을 떠나 살던 체코 지휘자 큐브릭이 삼십 년만인가 귀국해 얼마 전 몰다우강가 노천 연주장에서 눈물 흘리며 스메타나를 연주하고 오랜 감옥 생활에 이력이 난 극작가 하벨은 새 나라의 대통령이 되어 군중 속에 끼여앉아 그 강의 연주를 조용히 듣고 있었다. 배경으로 가는 비가 내리는 것이 보였다.)
-시집, <그 나라 하늘 빛>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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