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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고경숙 시인 / 꽃기름주유소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4. 22.

고경숙 시인 / 꽃기름주유소

 

 

얼었다 녹은 봄날 산벼랑

백설기처럼 푸슬거리는

산옆구리를 쥐고 달린다

포장을 마다하고

일부러 견고하지 않은 길은

덜렁이며 바람을 타다

오르막에서 멈춘다

계기판에 불이 들어온 지 한참,

고갯마루 작은 주유소엔

대형 탱크로리에서 꽃무더기를

옮겨담고 있다

고객님 얼마나 넣어드릴까요?

나는

L당 가격표를 보는 대신 꽃향기를 맡아본다

들꽃유로 가득이요

서둘러 주유기를 꽂고 뒤차로 간다

내 뒤 봉고는 콩기름을 주문한다

주유원이 탁탁 엉덩이를 치면

꽃향기를 내뿜으며 부릉거린다

카드전표로 가져온 광광나뭇가지에

손도장 꾹 눌러주고

출발!

손님, 내리막길은 무동력이구요

봄은 비과세입니다

 

 


 

 

고경숙 시인 / 휴전선 두루미

 

 

시베리아에 유배된

내 조상에 대해 묻지 말라

 

여기는

천적의 눈을 피해

필사적인 짝짓기로 실체를 확인하는

아나키스트들만이 사는

황무지

지뢰밭에 발 담그고도

나는 글을 몰라 철조망만 흔든다

잿빛 긴 목은

곡사포처럼 태양을 조준한 채

 

휴면하던 풀들이 일제히 사열을 시작하고

죽음처럼 숨죽인 비열한 독수리떼

몇 알의 곡기로 목구멍을 어른다

숨통을 조이지 마라

절대 강자는 없다

수십령 생애동안

오직

사랑했던 것들만 기억하련다

북을 두드려라 두드려

마지막 힘을 다해

부리로 철조망을 갉으며

진격이다

하늘이 원무한다

 

여기는

고립된 육지속의 섬

농약먹고 박제되어

화려한 부활을 꿈꾸는

두루미 한 마리

자동소총에 머리를 기대고

신새벽

자유를 지킨다

 

 


 

 

고경숙 시인 / 시뮬레이션 게임

 

 

6인 병실 구석침대에 사내가 누워있는 걸 알 수 없게

TV 수상기를 매단다 의사의 처방도 투약도

간호사들이 체온을 재러오는 일도 없앤다

육신 멀쩡한 보호자들이 얼마 후 있을 대선후보들의 토론을 보며

지방색을 드러내기에, 어긋난 대화를 서둘러 닫는다

 

흰 벽쪽을 보게 눕힌다 옆 침대로 똑똑 떨어지는 링거액을 메트로놈 삼아

손장단을 치는 사내, 가끔 벽에 암호처럼 악보 몇 줄 그려준다

착란의 흔적이라 하기엔 너무 선명하다겠지? 직립의 음표들,

음역이 넘나드는 창문 너머 단풍의 진한 각혈을 손질한다

신께 무상으로 증여받은 유전자들을 사내 날마다 소포장해 버릴 때마다

누구하나 눈길을 주지 않는다 나도 입을 다문다

시한을 정한다는 것은 병력의 시비를 따지고들 때 얘기라

이 병동에선 반칙이다

준엄한 의사의 권위에 도전할 수 있는 것은 죽음 뿐

사내의 혈색이 너무 비극적이라 고치려다 만다

 

병실전화가 울린다 때 묻은 환자복을 갈아입히고

사내의 침대를 비상엘리베이터로 깊숙이 내려보낸다

바람을, 어둠을 뒤따르게 한다

 

 


 

 

고경숙 시인 / 바람떡

 

 

아무나 주물렀다 놓고 가도

앞가슴 한껏 부풀리고

버선코 내려다보는

저 속 없는 년

 

 


 

고경숙 시인

1961년 서울 출생. 2001년 계간 《시현실》로 등단. 시집으로 『모텔 캘리포니아』(2004), 『달의 뒤편』(2008), 『혈穴을 짚다』(2013), 『유령이 사랑한 저녁』(2016), 『허풍쟁이의 하품』이 있음. 수주문학상, 두레문학상, 경기예술인상, 희망대상(문화예술부문), 한국예총 예술문화공로상 수상. 부천예총 부회장, 수주문학상운영위원장, 부천시 문화예술위원, 부천의 책 도서선정위원장, 부천신인문학상운영위원, 부천시립도서관 운영위원, 부천펄벅기념관 운영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