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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정윤천 시인 / 십만 년의 사랑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5. 26.

정윤천 시인 / 십만 년의 사랑

 

 

1

나에게 닿기까지 십만 년이 걸렸다

십만 번의 해가 오르고

십만 번의 달이 아울고

십만 년의 강물이 흘러갔다

사람의 손과 머리를 빌어서는

아무래도 잘 헤아려지지 않았을 지독한

고독의 시간

십만 번의 노을이 스러져야 했다

2

어쩌면, 십만 년 전에 우리와 함께 출발했을지도 모를

산정의 별빛 아래

우리는 이제 막 도착하여 숨을 고른다

지상의 사람들이

하나 둘 어두움 속으로 문을 걸어 잠그기 시작하였다

하필이면 우리는 이런 비탈진 저녁 산정 위에 이르러서야

가까스로 서로를 알아 보게 되었는가

여기까지 오는데 문득 십만 년이 걸렸다

잠들어 가는 지상의 일처럼 우리는 이제 그만 잠겨져도 된다

더 이상의 빛을 따라나서야 할 모든 까닭이 사라졌다

3

천 번쯤 나는 매미로 울다 왔고

천 번 쯤 뱀으로 허물을 벗고

천 번쯤 개의 발 바닥으로 거리를 쏘다니기도 했으리라

한번은 소나기로 태어났다가

한번은 무지개로 저물기도 하였으리라

4

너에게로 닿기까지 십만 년이 걸렸다

물방울 같은 십만 년이

물방울마냥 둥글게 소멸되고 난 뒤에서야

서로에게 닿기까지엔 십만 년이 걸렸다.

 

 


 

 

정윤천 시인 / 가을이라고 불러 버리자

 

 

솜꽃인양 날아와 가슴엔 듯 내려앉기까지의

지난했을 거리를 가을이라고 부르자. 아니라면,

기러기 한 떼를 다 날려 보낸 뒤에도 여전히 줄어들지 ㅇ낳은

저처럼의 하늘을 가을이라고 여기자

그날부터선 당신의 등 위로 바라보이는 한참의 배후를

가을이라고 느끼자

더는 기다리는 일을 견딜 수 없어서, 내가 먼저 나서고야 만

이 아침의 기척을 가을이라고 부르자

화지사가 바라보이던 담장 앞까지 왔다가, 그 앞에서

돌아선 어느 하룻날의 사연을 가을이라고 믿어 버리자

생이 한번쯤은 더 이상 직지할 수 없는 모퉁이를 도는 동안

네가 있는 동안만 내가 있어도 되는

마음의 이런 지극한 한 순간을 가을이라고 이름 붙여 주고 나면

마침내 돌아갈 곳이라곤 송두리째 사라져 버려선

어디에선가 눈먼 순간만 같은

저녁녘 같은, 아득한 비어져 버림 하나를 가을이라고 쓰기로 하자

 

 


 

 

정윤천 시인 / 말투

 

 

불현듯 당신이 곁에 없을 때

'허전해'라는 말이 모르는 사이에 새어 나올 때

그 말은 이미 입술의 말이 아니다

견딜 수 없는, 몸이 지르던 소리

그렇게 어깨 한쪽이 시큰하게 결려올 때도

몸은 벌써

모로 누워서 뒤채인

잠 못 이룬 어제의 시간을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다.

사랑한다는 일이 그런 것이다

서로를 반드시 기억하는 일이다

내가 보낸말로

네가 다시 부쳐 온 말을 읽는 시간

당신의 말투는

그 사이에 벌써 내 말 버릇마저 닮아 있다

사랑이여

우리는, 같은 목청으로 다투고 같은 음계로 운다.

 

 


 

정윤천 시인

1960년 전남 화순에서 출생. 광주대학 졸업. 1990년《무등일보》 신춘문예 당선, 1991년 《실천문학》으로 등단. 시집 『생각만 들어도 따숩던 마을의 이름』 『흰 길이 떠올랐다』 『탱자꽃에 비기어 대답하리』 『구석』 등과 시화집 『십만 년의 사랑』 펴냄. 광주 전남 작가회의 부회장, 계간 『시와 사람』의 편집 주간 등을 역임. 2018년 제13회 지리산문학상 수상. 예술카페 <첫눈> 운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