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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왕노 시인 / 태양의 거리와 태양의 돌과 나

by 파스칼바이런 2023. 5. 26.

김왕노 시인 / 태양의 거리와 태양의 돌과 나

 

 

1

 

나는 늘 태양의 거리란 말이

입에 감돌고 있다.

빛나는 태양을 바라보며 가지고 잎이고 껍질이고

다 사라지고 몸뚱이 하나만 남았으나

끝내 꿋꿋하게 서 있는 강대나무를 보면

경외감마저 들고 태양의 거리란 말이 저절로 터져 나온다.

태양과 강대나무와 내가 이룬 삼각구도

불멸의 풍경 같아 나도 우듬지까지 꽃 피우던 나무 같아

청춘이 가도 태양아래 강대나무처럼 서서 태양과 구도를 이루기를

 

나는 자작나무 숲이나 모든 광장과 골목과 거리

태양의 거리라 부르고 밤이어도 태양이 잠깐 쉬러간

태양의 거리고 우리의 시간마저 태양의 시간이라 부른다.

너무 익숙해졌지만 태양의 존재를 잊어서는 안 된다.

끝없이 핵융합반응으로 존재를 고집하지만

100 억년 생존기 중 46 억년을 살았으므로

아직은 건재하게 보이는 태양의 거리나 사라질 거리다.

태양의 거리에서 사랑, 태양의 거리에서 그리움

태양의 거리에서 만남 태양의 거리에서 이별마저

태양처럼 눈부시기를 바란다.

 

태양의 거리에서 전쟁이 있고 태양을 피한 지하공장에서

가공할만한 파괴력의 무기를 만드나

이제는 태양의 거리라며 태양의 거리 모든 것을 태양빛이 보살피듯

태양의 후예인 우리도 살상의 꿈을 버리고 서로 보살피는 것이다.

태양이 길러놓은 가로수 아래로 걸어가며

태양이 증인으로 빛나는 태양의 거리에서

태양이 보면 하찮을 우리지만 끝내 지켜주는 태양처럼

이제 모든 분쟁의 종지부를 찍고 태양이 퍼붓는 햇살의 샤워를 하고

우리의 울력으로 더 큰 태양의 거리를 만드는 것이다.

이것은 태양에게 아부하는 것이 아니라 일찍이 태양의 존재를

막장 같은 세월 속에서 알아챘으므로 아무리 작은 벌레라도

풀잎이라도 태양의 주는 느낌으로 예감으로 힘으로 살아가기에

지금 태양에 대해 말하는 것은 늦은 감이 있으나

태양의 거리에 대해 나직이 중얼거리는 것이다.

 

2

 

저물어갔으나 지구 반대편으로 가 여전히 불타는 태양의 일관성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얼마나 많은 약속을 어기고

줏대도 없이 일관성도 없이 변화를 부르짖으며

태양 아래서 겁도 없이 파괴에 혈안이 되어 몸부림쳐 왔던가.

조금만 태양이 더 다가온다면 불로 멸망할 나약한 존재이며

목소리에 힘을 주고 오만방자한 추태로

태양의 거리를 활보했던 우리인 것이다.

가장 비폭력적인 태양아래서 폭력에 익숙해

태양이 준 꿈마저 유린하는 우리인 것이다.

나는 지구자체를 아예 태양의 거리라 부른다.

나는 모든 인공물마저 태양이 만든 것이라 본다.

태양이 멈추면 모든 것이 일순간 정지해버리는 혼란이 오므로

그러나 태양의 거리에 살아가는 우리를 보고 불멸이 아닌 태양마저

불멸을 꿈꾸지 않을 수 없으므로

태양의 거리에서 우리도 불멸인인 것처럼 걸어가기 바란다.

이 모든 깨달음은 문득 태양풍이 불어오듯 불어오고

 

한 송이 장미가 태양을 향해 불타오르듯 피어나는 것은

태양의 불멸을 위한 곡진한 기원이므로

태양의 거리에서 아무렇지 않는 듯 우리 스치며 살아가지만

끝내 태양이 가슴에 묻어준 태양의 돌이 심장이라는 것을

함부로 팽개치거나 부셔버릴 수 없는 태양의 돌이라는 것을

아무리 극에 달한 사랑일지라도

끝내 지켜주는 태양의 돌이라는 것을

 

웹진 『시인광장』 2023년 4월호 발표

 

 


 

김왕노 시인

1957년 경북 포항 동해 출생. 공주교대 졸업. 아주대학원 졸업. 1992년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꿈의 체인점〉으로 당선. 시집 『황금을 만드는 임금과 새를 만드는 시인』 『슬픔도 진화한다』 『사랑, 그 백년에 대하여』 『아직도 그리움을 하십니까』 등이 있음. 2003년 제8회 한국해양문학대상, 2006년 제7회 박인환 문학상, 2008년 제3회 지리산 문학상, 현재 웹진『시인광장』 편집주간, 시인축구단 글발 단장, 한국 디카시 상임이사, 한국시인협회 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