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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명 시인(안동) / 전이轉移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5. 26.

이명 시인(안동) / 전이轉移

 

 

마당가 설중매 한 그루

꽃을 피웠을 뿐인데 집이 환하다

봄은 아직 멀었는데

내 마음도 등불 켜놓은 듯 밝다

눈길에 남아 있는 발자국, 기억은 선명한데

가지 사이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다리미 하나

홑청이 펴지고

구겨진 마당이 빳빳해진다

눈 감으면 더욱 뚜렷해지는 집의 풍경

겨우내 헝클어진 내 속도 말끔히 펴진다

온몸이 붉게 물든다

 

 


 

 

이명 시인(안동) / 산중에 살다 보니

 

 

산중에 살다 보니

움직일 때마다 목에서 목탁 소리가 난다

등뼈와 고관절에서도 우두둑 법고 소리가 난다

 

여기저기서 울려 나오는 소리

몸도 이제 절간이 되어가나 보다

 

곳곳의 울림이 다른 것을 보니

아직 내려놓지 못하고 있는 얽히고설킨 것들이 많나 보다

 

소리 없이 머리는 희고

비틀 때마다 삐걱거리는 어설프고 낡은 몸이 야단법석이다

 

절집이 허술하다

 

 


 

 

이명 시인(안동) / 강각에서의 하룻밤

 

 

어스름 저녁 강각에 올라 보니

맨 먼저 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감각이 부드러웠다

누군가 볼에 손을 대고 다가오는 것 같았다

물소리가 들려오고

그것은 어쩌면 흥얼거리는 어부가 같았다

노을 가득한 하늘로 구름이 흐르고 있었다

누군가 노를 젓고

누군가 색동옷을 입고 춤추는 것 같았다

 

귀를 막고

두 손으로 귀를 막고

분어행盆魚行* 시를 지으며

얼마나 피하고 싶은 어지러운 세상이었겠는가 그때가

귀거래 귀거래하며

얼마나 그리워했겠는가 늙은 부모 계시는 고향 집을

얼마나 아름답고 깊이가 있었겠는가 유구한 산천이

또 얼마나 즐거웠겠는가

강물에 잔을 띄워 술 마시며 노래하는 삶이

 

바위는 귀가 먹지 않았다

 

*농암 이현보가 퇴계 이황 형제에게 지어 보낸 장문의 시로서 그 당시 관료들을 어항 속의 물고기에 비유하며 정계 은퇴를 종용한 시.

 

 


 

 

이명 시인(안동) / 기사문 아쉬람

 

 

내 마음속 검은 그림자 하늘에 올라

먹구름 오락가락하더니

눈이 내린다

하늘이 버리는 거라 하얗다

내려놓고 나니 더없이 가벼운

신의 투명한 이름 창공

불타는 힌두

허공이 방하착하는 저 눈부심

 

-시집 『산중의 달』에서

 

 


 

이명(李溟) 시인(안동)

1952년 경북 안동 출생. 2010년 <문학과 창작> 신인상을 수상을 통해 등단. 2011년 <불교신문> 신춘문예에 당선. 시집 『분천동 본가입납』 『앵무새 학당』 『벌레문법』 『벽암과 놀다』 『텃골에 와서』 『초병에게』 『산중의 달』. 시선집 『박호순 미장원』 등. 2013년 목포문학상을 수상. 전 한국거래소 최고정보책임자(CI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