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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신진 시인 / 호숫가에서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5. 28.

신진 시인 / 호숫가에서

 

 

어둠을 기다렸다가

한 치씩 더 흔들거리는

달빛을 따라

어둠을 기다렸다가

한 걸음씩 따로 자리를 내는

백양나무 숲을 따라

호숫가에 서면

돌아가기 싫구나.

성냥을 그으면

수면 위에 펼쳐지는 마을의 잔치

여기저기 불꽃 올리는

의식의 끝마을

내 어린날의 나팔소리는 저 어느 자리

무슨 빛의 등(燈)으로 매달렸기에

상기도 고운 노래 불러대는가?

다시 불 켜면

솟을대문 사이로 초롱 들고

얼굴 내미는 소년.

아이야

아이야, 할 말이 있다. 문 열어라.

나도 어둠을 기다렸다가

한 치씩 더 흔들리고 싶다.

흔들림이고 싶다. 흔들림이다, 나는.

날이 새자

호숫가에 허기진 들짐승 하나

소리도 없이 짖고 있다.

이젠, 먹이를 찾아

돌아가야 한다.

 

 


 

 

신진 시인 / 낙서

 

 

삼각형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아이는 낙서를 한다.

거대한 악당이

정의의 동자 앞에 꼬꾸라지는

낙서는 두고두고 되풀이된다.

정의가 무엇인지

얼마나 허약한지도 모르고

 

시내버스에 매달려

젊은이는 남몰래 손가락 낙서를 한다.

전자 계산기 대지 않아도

손가락 접기로 끝나는 계산

그리고 또 그려도 끝없는 미련

계산이 무엇인지

얼마나 불손한지도 모르고

 

꼴베던 노인네가 하늘을 본다.

낫은 공중에서 비틀거린다.

노자 없이 새벽길 떠난 아들놈

일자리는 구했다는데

일터도 사는 집도 말해 주지 못하는 딸년

낫질로 다듬고 깎아 보아도 온전히 서질 않는다.

모두모두 낙서를 한다.

낙서가 무엇인지

얼마나 무책임한지 위험한지도 모르고

 

 


 

 

신진 시인 / 狂女日記

 

 

산복도로 시장입구 체육공원길에 오가는

젊고 늙은 연놈들이 모조리 미쳤다고

나는 말하기 싫어

다 떨어진 웃동네 삼거리에서

매일 낮밤 진을 치고 나는 보았지

출근시간 퇴근시간 날 볼 때마다

물 튀기고 사라지는 연민의 낯짝

손가락 미리 꼬누고 조금 웃고 가는 놈 몇 놈인지

낯짝만 이쪽으로 조금 웃고 가는 년 몇 년인지

장부하지 않아도 나는야 알지.

스무날 낮밤을 지켜보아도 정신나간 연놈들

웃는 얼굴 우는 얼굴 똥마려운 얼굴로

사람앞을 저만큼씩 돌아 가기만 하고

손가락질 돌맹이질로 돌아 가기만 하고

사람 바로 보는 것이 하나 없구나.

동지섣달 찬바람 긴긴 겨울밤

밤마다 저혼자 남는 강냉이 튀김솥

새까맣게 식은 대가리 끌어안으면

뻥뻥 열 쏟으며 겨울밤 녹여 주는 내사랑아 내사랑아

어떤 놈은 춥다고 철없이 집을 묻고

어떤 년은 낯 씻으라 옷갈아입으라 하고

어린놈이 순경 부른다 땅을 차며 겁을 주고

묻기는 나에게 왜 물어 보나

보면 모를까, 이 미친년을

어느 한때 성한 것 볼 수 없구나.

다 떨어진 웃동네 바람부는 삼거리 지켜가면서

강냉이 튀는 소리에 박자 맞춰 타산을 해도

내게는 없구나, 들 집도 씻을 낯짝도.

 

 


 

신진(辛進) 시인

1949년 부산 출생. 『시문학』 추천으로 문단에 나옴.(74-76). 동아대학교 국문과. 성균관대학교에서 문학박사 학위. 저서로는 시집으로 『풍경에서 순간으로』 등 7권과 논저로『한국시의 이론』 등 8권이 있음. 시문학상, 봉생문화상, 부산시 문화상 등 수상. 동아대 문창과 교수, 인문대 학장 등을 역임 후 정년 퇴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