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고경숙 시인 / 폐광을 거닐다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5. 28.

고경숙 시인 / 폐광을 거닐다

 

 

반짝이는 것은 모두 각광을 받았다

 

빛나는 것들을 위해 주변은 어두워야 했고

시간은 볼모가 되었다

 

만주벌판을 호령하던 삼족오의 후예는 권위의 상징으로

땅끝마을 갯벌을 뒤지던 초로의 아낙은 언약과 보은으로

 

이 빛나는 붙이를 지녔으리라

 

어둠을 채굴하면 빛이 되고 빛을 채굴하면 권력이 되는

종속의 관계

 

폐기의 수순을 밟는 순간부터 광산은 한낱 동굴이 된다

 

은밀하고 습한 곳은 쥔 자와 굴屈한 자가 알아서 구분 돼

굴한 자는 그곳에서 저항의 죽창을 깎고

쥔 자는 은밀한 학살의 장소로 썼다

 

한 발짝 발을 내디딜 때마다 물 떨어지는 소리, 들린다

영광과 오욕을 지나오며 역사책 어느 구석에도 없는

잡초투성이 폐광 입구에

우연히 불어오는 바람 한 줄기,

 

서늘하게도, 폐광은

사람의 한 생과 닮았다

 

반짝이는 꿈을 좇아 쉼 없는 노동을 했고

닳아빠진 육체 숭숭 뚫린 뼈의 길처럼

허리 펴지 못한 그곳에서

공습을 피해 굴댕이*가 태어나고 게서 자랐다

반짝이는 것은 누구의 영광이었단 말인가

물소리는 끊임없이 모스 부호처럼, 말한다

역사의 조력자로 억겁을 살아온 폐광은, 읊조린다

반짝이지 않아도 빛나는 것들이 있다

 

* 피난 중 굴속에서 낳은 아이

 

 


 

 

고경숙 시인 / 세상의 모든 세컨드는 우울하다

 

 

 첫눈 오는 거리로 쏟아져 나온 약속들이 설렘과 감정의 지속을 전제로 한 것이라면 두 번째라는 말은 김 빠진 맥주처럼 익숙하고 펑퍼짐하다 무릎 나온 츄리닝이다

 

 둘째라는 말에는 항상 서열이 있고 세 번째 네 번째가 밀려있으니 언제고 떨쳐 낼 수 있다는 위력이 있다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시계의 초침처럼 불안함이 내재되어 있는 순간이란 말이다

 

 세컨드라는 말엔 오래된 서사가 있다 은밀하게 드러나지 말아야 하는 유령 같은 삶이 있고, 그 유령의 존재가 허술한 인생들 사이에선 한때 힘처럼 보이던 역설이 있다

 관공서의 낡은 장부, 만년 과장의 캐비넷에서 잠자는 동안 세컨드는 정正이 아닌 부副로 늘 대안이었고 예비였다 트럭 뒤 여분으로 싣고 다니는 중고타이어였다

 

 세컨드는 생각 한다

 찬란한 세상 저편 혁명처럼 붉은 하늘 너머 태초의 첫 문장은 무엇이었을까 둘째가라면 서럽다는 원천적 슬픔도 두 번째라는 익숙한 감정도 가끔은 사랑이란 말로 대치될 수 있을까 만일 두 번째 삶이 다시 온다면 점유했던 모든 것에서 내려 긴 길에 홀로 점이 될 수 있을까

 

 


 

 

고경숙 시인 / 골목에서 울다

 

 

돌아보지 않아도 슬픔의 최전선이다

시장통 외진 골목을 걸어가며 우는 뒷모습은,

 

셔터에 밀려 버려진 가게 문짝들

드럼통과 생선 상자들로 굴곡진 벽

기댈 곳도 잡을 곳도 없다

바닥에 낙엽 한 장 굴러와 쌓일 형편도 아닌 그곳,

 

앞만 보고 걷다가 하수도 배관에 걸리고 마는 골목,

그곳은 이미 여러 번 고꾸라져 본 이들과

기댈 곳 없어 주저앉던 이들이 지나는 길,

 

늘어진 전선들이 노을 속에 엉켜있는 저녁

울며 걷는 사람에게 길은 길이 아닐 때가 있다

 

사람이 살아가며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것을

이미 보아온 골목은

어쭙잖게 훈계나 위로를 하지 않는다

그저 묵묵히 그가

슬픔을 밟고 지나가도록, 견디어주도록,

 

그리고, 다 지나간 다음

뒹구는 생선상자를 제자리에 쌓고

여전히 골목의 끝이 큰 길에서 보이지 않게

외진 길로 돌아앉아 있는 것,

 

구부러진 시장통 골목은 막다른 이가 찾아가는

시장통의 공소(公所), 슬픔의 최전선이다

 

 


 

 

고경숙 시인 / 플리바게닝

 

 

 해발 700m는 아침엔 영하 낮엔 영상의 온도가 유지돼 고로쇠나무 생육에 최적이라며 남자는 상기됐다

 

 무기질 함량이 풍부하고 수액 체취 후 정제와 살균으로 저장기간이 길고 위생적이라는 얘기 끝에 남자는 거품을 물며 웃었다 기자도 웃었다

 

 나무는 옆구리에서 뭉클 수액이 빠져나갈 때마다 진저리를 치며 생각했다 오들오들 떨었던 밤엔 통증으로 낮엔 탈수로 불면인 봄날,

 

 옆구리 호스를 빼고 아버지나무가 비로소 편해진 날도 볕은 따뜻했고 바람은 살랑거리는 생육 최적의 날이었다

 

 잔맛 없고 단맛 나는 수액의 생산자가 바로 우리라고, 가지를 뒤틀고 잎을 흔들어봤다 깐깐한 검증을 통해 나온 수치로 ‘자연의 맛’을 강조한 생산자는 허가증을 품고 돌아갔고,

 

 끝까지 항변하지 못했다 우선은 살아야 했고 회유는 깔끔했으므로,

 

 덕분에 나머지 세 계절은 편안했다

 

 그런데 자꾸 궁금했다 정말 자연의 맛은 어떤 맛일까?

 

*플리바게닝: 유죄를 인정하거나 증언을 하는 대가로 형을 낮추거나 가벼운 죄목으로 다루기로 거래하는 것.

 

 


 

 

고경숙 시인 / 고양이와 집사와 봄

 

 

 고양이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봄입니까?

 고양이는 대답 대신 눈을 지긋이 감고 꼬리를 흔듭니다

 

 남자는 일어섰습니다 예식장에도 들어가 보고 초등학교 열린 교문으로 들어가 운동장을 거닐어보기도 했습니다 느티나무 가지에 파랗게 싹이 나오는데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습니다

 

 여자가 남자를 찾아나섰습니다 점심상 차려놓은 지가 언젠데 안온다고 ‘솔’ 톤으로 약간 격앙 됐습니다 미나리무침과 쭈꾸미숙회입니다 꽃무늬 앞치마를 펄럭이며 동네를 뛰어다닙니다

 

 마을버스 정류장 앞에서 우체부 아저씨를 만났습니다 아저씨는 잘 만났다고 오토바이를 세우고 우편물을 건넵니다 시집입니다

 

 우체부가 지나가고,

 여자가 집에 들어가고,

 남자가 대문을 괴어놓고,

 그 틈으로 고양이가 들어갑니다

 

 고양이는 마당을 사뿐히 건너 부엌으로 갑니다

 부뚜막에 천천히 자리를 잡습니다

 부엌문 너머 낮술 얼큰한 남자에게 고양이가 물었습니다

 당신은 봄입니까?

 남자는 대답 대신 눈을 지긋이 감고 발가락을 까딱댑니다

 

 


 

 

고경숙 시인 / 상자와 봉지

 

 

 거기 꼭 딸려오는 사람이 있지

 상자와 봉지를 두고 떠난 사람들, 때론 이별로 때론 죽음으로 멀어진 관계들을 생각해

 

 외형의 문제라고 보기엔 성급한 단언이 찜찜하고 내면을 생각하면 낮과 밤의 서사가 담겨있어 맥 못 추고 나는 주저앉아

 

 상자가 계급적일 때 있었지 상자 내민 의기양양한 표정과 딱딱하고 각진 모서리 감촉만으로도 짐작되는 그곳, 뚜껑을 여니 환한 대낮처럼 물씬 풍기던 자본주의 냄새 앞에 왜 저절로 공손해졌는지,

 

 까만 봉지처럼 후줄근한 겨울밤 건네받은 봉지엔 보나마나 만원 안팎의 주전부리, 그러니까 굳이 고맙다고 안 해도 될 만한 그러나 당신의 주머니를 탈탈 턴 모두라는 사실 앞에 왜 서글퍼졌는지,

 

 상자와 봉지는 함께 들어가도 놓이는 곳은 서로 달라 당당하게 중심부로 걸어가는 상자 대신 봉지는 알아서 입구 구석에 가만히 앉지, 기다리지

 

 봉지 속은 대개 무리거나 단짝이어서 기다림이 지속돼도 외롭진 않아 붕어빵을 꺼내 허기를 달래거나 새우깡을 안주 삼아 홀짝 거리지, 기다리지

 

 


 

 

고경숙 시인 / 다윗의 잠

-슈나미티즘(Shunammitism)*

 

 

 공들인 잠을 자고 있네

 태초의 숲속 어디에도 길은 없었네 발을 들어 옮길 때마다 꿈은 물방울로 변하고 비루한 몸 어디에 남아있었는지 모를 마지막 근력이 사력을 다할 때, 시간은 미궁으로 빠지네 당신은 얼마나 걸었을까 팔레스타인 바위산을 지나 척박함이 극에 달할 때 토막 난 심장의 일부가 가슴뼈 사이로 분출하고 다시 매몰되기를 반복하며 환상방황을 하네 죽음은 어쩌면 생각보다 가까이 와있을 지도 모르네 절망과 속수무책의 갈증이 호흡을 가쁘게 해 그때 당신은 점점 몸이 가벼워지고 있었던가 시야가 흐려졌던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허공에 손을 저어 두려움을 떨치려 하네 손에 잡히는 감촉, 늑골처럼 가로지른 나뭇가지에 나풀대는 리본인가 꿈이던가 생시던가, 형체 없이 그저 감촉으로 온기가 느껴지네 천만년 동안 당신을 기다려온 듯 천천히 아주 천천히 당신을 인도하네 베인 발바닥에 약풀을 비벼 대주고 한기 가득한 몸을 품어주네 꿈속의 잠이어도 잠 속의 꿈이어도 상관없네 들숨과 날숨을 반복하며 재생되는 잠,

 침대에서 소녀가 빠져나가네

 

*서양회춘법

 

-시집 <고양이와 집사와 봄>에서

 

 


 

고경숙 시인

1961년 서울 출생. 2001년 계간 《시현실》로 등단. 시집 『모텔 캘리포니아』 『달의 뒤편』 『혈穴을 짚다』 『유령이 사랑한 저녁』 『허풍쟁이의 하품』 『고양이와 집사와 봄』이 있음. 수주문학상, 두레문학상, 경기예술인상, 희망대상(문화예술부문), 한국예총 예술문화공로상 수상. 부천예총 부회장, 수주문학상운영위원장, 부천시 문화예술위원, 부천의 책 도서선정위원장, 부천신인문학상운영위원, 부천시립도서관 운영위원, 부천펄벅기념관 운영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