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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경미 시인 / 청춘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5. 28.

김경미 시인 / 청춘

 

 

없었을 거라고 짐작하겠지만

집 앞에서 다섯 시간 삼십 분을 기다린 남자가

제게도 있었답니다

 

데이트 끝내고 집에 바래다주면

집으로 들어간 척 옷 갈아입고

다른 남자 만나러 간 일이 제게도 있었답니다

 

죽어 버리겠다고 한 남자도

 

물론 죽여 버리고 싶은 남자도

 

믿기지 않겠지만

 

- 시집 『당신의 세계는 아직도 바다와 빗소리와 작약을 취급하는지」

 

 


 

 

김경미 시인 / 취급이라면

죽은 사람 취급을 받아도 괜찮습니다

살아 있는 게 너무 재밌어서

아직도 빗속을 걷고 작약꽃을 바라봅니다

몇 년 만에 미장원엘 가서

머리 좀 다듬어 주세요, 말한다는 게

머리 좀 쓰다듬어 주세요, 말해 버렸는데

왜 나 대신 미용사가 울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잡지를 펼치니 행복 취급하는 사람들만 가득합니다

그 위험물 없이도 나는

여전히 나를 살아 있다고 간주하지만

당신의 세계는

어떤 빗소리와 작약을 취급하는지

오래도록 바라보는 바다를 취급하는지

여부를 물었으나

소포는 오지 않고

내 마음속 치욕과 앙금이 많은 것도 재밌어서

나는 오늘도

아무리 희미해도 상관없습니다

나는 여전히 바다 같은 작약을 빗소리를

오래오래 보고 있습니다

 


 

 

김경미 시인 / 결심은 베이커리처럼

나는 나를 잘 모른다

나를 잘 아는 건 나의 결심들

가령 하루를 스물네 개로 치밀하게 조각내서 먹는

사과가 되겠다든지

밤 껍질 대신 뼈를

혹은 뼈 대신 고개를 깎겠다는 것

사람의 얼굴 양쪽에는 국자가 달렸으니

무엇이든 많이 담아 올리리라

국자가 아니라 손잡이라든가

그렇다면 뭐든 뜨겁게 들어 올리리라

여하튼 입을 벌리고 살지 말자

나를 나보다 더 잘 아는 건 내 결심들

한밤의 기차에 올라

옥수수를 너무 많이 먹어

입안이 감당 안 되는 느낌처럼

무엇보다 창피스러운 건

떠나면 후회할까 봐 후회를 떠나지 못하는

신선한 베이커리 빵집처럼

언제나 당일 아침에 만들어서

당일 밤에 폐기하는

결심들만큼

영원히 나를 잘 모르는 것도 없다

 

 


 

김경미(金京眉) 시인

1959년 경기도 부천 출생. 한양대학교 사학과 졸업. 198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비망록〉이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쓰다만 편지인들 다시 못쓰랴』 『이기적인 슬픔들을 위하여』 『쉬잇, 나의 세컨드는』 『고통을 달래는 순서』 『밤의 입국 심사』 『카프카식 이별』 『당신의 세계는 아직도 바다와 빗소리와 작약을 취급하는지』 등과 사진 에세이집 『바다 내게로 오다』가 있음. 2010. 서정시학 작품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