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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면우 시인 / 봄밤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5. 31.

이면우 시인 / 봄밤

 

 

늦은 밤 아이가 현관 자물통을 거듭 확인한다

가져갈 게 없으니 우리 집엔 도둑이 오지 않는다고

말해주자

아이 눈 동그래지며, 엄마가 계시잖아요 한다

 

그래 그렇구나, 하는 데까지 삼 초쯤 뒤

아이 엄마를 보니

얼굴에 붉은 꽃, 소리 없이 지나가는 중이다.

 

 


 

 

이면우 시인 / 버스 잠깐 신호등에 걸리다

 

 

 큼직한 손바닥에 상추 펼치고 깻잎 겹쳐 그 위에 잘 익은 살코기 얹고 마늘 된장 쌈 싸 한입 가득 우물대는 사내 보는 일 그것참 흐뭇하오 맑은 술 한잔 약봉지 털듯 톡 털어 넣고 마주 앉은 이에게 잔 건네며 껄껄대는 사내 보는 일 역시 흐뭇하오 그 곁에 젊은 여자, 호 불어 넣어 준 제 아이 오물대는 입을 그윽한 눈빛으로 지켜보고 있었소.

 

 유리벽 이쪽에서 나도 저리 해보리라 마음먹은 저녁은

 

 신호등 떨어진 네거리처럼 무수히 흘러갔소.

 

 


 

 

이면우 시인 / 밤 벚꽃

 

 

젊은 남녀 나란히 앉은 저 벤치, 밤 벚꽃 떨어진다

떨어지는 일에 취한 듯 닥치는 대로 때리며 떨어진다

가로등 아래 얼굴 희고 입술 붉은 지금

천년을 기다려 오소소 소름 돋는 바로 지금

 

몸을 때리고 마음을 때려, 문득 진저리치며 어깨를 끌어안도록

천년을 건너온 매질처럼 소리 안 나게 밤 벚꽃 떨어진다.

 

 


 

 

이면우 시인 / 십오 초

 

 

다리 저 끝 검정 우산 점점 커지며

세찬 물소리에 싸여 가늘고 길게

애조 띤 노래도 함께 다가왔다

마주 스치는 십오 초

목소리 주인은 차마 보지 못했다

난간 바로 아래 갈길 바쁜 맑은 물살이

듣는 몸 안쪽 살짝 돌아가는 서늘함

페달 부려 힘껏 구르는 비옷 안 마음은

그것이 다만, 슬픔에 짓눌린 신음이 아니길

지금이 울어야 할 꼭 그때라면

다가오는 사랑의 예감 때문이길

바라며

 

 


 

이면우 시인

1951년 대전에서 출생. 보일러공으로 생업. 방송대 문화교양학과. 한남대 문창과 대학원 졸업. 1991년 첫 시집 《저 석양》을 펴내면서 등단.  『아무도 울지 않는 밤은 없다』 『그 저녁은 두 번 오지 않는다』 『십일월을 만지다』. 2002년 시 〈거미〉로 제2회 노작문학상 수상. 호서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