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하기정 시인 / 구름의 화법 외 10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5. 31.

하기정 시인 / 구름의 화법

​​

구름은 여태 제 모습을 보여 준 적이 없어

형상은 당신 머릿속에나 있지

내가 만들 수 있는 건 물방울이 아니야, 보다 가볍지

당신의 어깨를 적실 수도당신의 입가를 핥을 수도 있지

그러니 나를 구름이라 이름 짓는 건 아주 치명적이지

네가 구름이라고 부르는 것들, 네가

토끼, 라고 부르면 난 하마처럼 하품을 해 네가

고양이, 라고 부르면 난 호랑이처럼 포효하지 네가

의자, 라고 부른다면 금세 침대를 만들어 줄 수도 있어

만지면 폭삭 꺼지는 먼지버섯, 그러니 나를

버섯이라 불러도 좋아

형상은 당신 눈 속에나 있지

그러니 S라인 B라인은 네 이름

무대가 아닌 곳에서만 춤을 출 거야

내 음악은 내 귀로만 흘러들어 언제든지

다시 태어날 수 있어 나를

이해하려 시도한다면 그것은 서툰 오해

나를 만지려 든다는 건 아주 절망적이야

롤러코스터를 생각한다면 모르지

추락은 오로지 빗물, 눈물

행여 구름을 담아서 팔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마

내가 할 수 있는 건 당신의 시선을 구부리는 일

악어, 라고 하면 도마뱀이 되어줄래?

고래, 라고 하면 돛단배가 되어줄래?

나에게 나를 너, 라고 불러 줄래?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2010년 《영남일보》 문학상 당선시

 


 

 

하기정 시인 / 퍼즐 맞추기

감정은 시가 되지 않는다

뜬눈으로 일어나 이를 닦고

새벽에 먹는 밥이 아침밥이 아니듯

 

죽은 시계는 있어도 죽은 시간은 없다

등을 힘껏 껴안은 팔이

사실은 내 양팔이었다는 것

이성을 잃고 쓰러진 자리를

무덤이라고 쓴다

 

죽은 당나귀 귀가 탑처럼 쌓인 거리를

눈 부릅뜨고 걷는다 해도

고백은 자백이 되지 않았다

방백은 독백 처리된다

내가 나에게로 보내는 택배 상자처럼

연민은 시가 되지 않는다

 

주머니를 뒤집으면 비밀처럼 깊숙하게

어제 산 물건의 목록이 세탁기 속에서 반죽된다

값을 치른 영수증은 증거가 되지 않는다

 

내가 凸을 보낼 때

반사적으로 凹를 날린다

 

변죽만 울리다 모서리가 짓이겨진 것들은

퍼즐이 되지 않는다

​​​

계간 『시와 경계』 2022년 겨울호 발표

 


 

 

​하기정 시인 / 반대말

​​

여름의 반대말은 손바닥

뒤집으면 소나기가 쏟아졌다

무지개가 없어도 한바탕 꿈을 꾸고 나면

구름의 반대말은 나비

여덟 번째 태어나는 배추흰나비

애벌레였던 적을 모르고 배추의 맛을 몰라

영혼을 사각사각 갉아먹는 푸른 사과의 반쪽

너는 밤의 불빛을 나는 낮의 그림자를

내가 꽃을 향해 날개를 펼 때

지는 꽃 위에 날개를 접네

그러니까 당신의 반대말은 당신,

지구 끝까지 당신이라는

당신, 벽장문처럼 안으로만 잠겨 있는

웹진 『시인광장』 2023년 3월호 발표

 

 


 

 

하기정 시인 / 마음의 양감

 

 

마음과 마음이 만나면 투명 습자지처럼

겹쳐 그리는 연필선

양적인 감정과 질적인 감정

우리에겐 고요를 그리는 연습이 필요하다

 

옆집의 정원을 탐했다

하릴없이 새를 빌려 오기도 했다

새의 마음으로 들어가

새의 기분이 되는 것을 두 마음이라고 하자

그걸 이중인격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은

도무지 나눌 수 없기 때문이다

왼발과 오른발 같기 때문이었다

왼손과 오른손이 부딪치는 박수 같기 때문이다

양배추 속 같은 마음을 떼어서 셀 수 있다면

가면 속에 숨어 있는 얼굴을 가리키며 걷는다

손가락으로 누르면

물컹하고 연약하고 툭하면 다치고 상처 나고 미끄러지는 그것을

해삼처럼 움찔하는 그것을

 

ㅡ시집 『고양이와 걷자』 2023년,

 

 


 

 

하기정 시인 / 사랑의 이름으로 단호한 것들

 

 

나에겐 잘 묶어진 보자기가 있어요

작약이 그려진 광목 보자기에

담은 것들이 있어요

 

젓가락과 지팡이

오리와 거위

눈사람과 돛단배

파도와 물고기

흰구름과 술잔

 

숨은그림 안에 숨어 있는 아라비아 숫자와

복숭아 모양의 분홍 심장

걷는 사람을 뛰게 하는 비상 장비와

모자가 포개져 있어요

 

악어와 악어새의 사이

박각시나방과 꽃범의꼬리꽃 사이

필요충분조건으로

명백하게 감춰진 사랑이 있어요

 

초록 입술과 붉은 석류 이빨

밀도 높은 과실수가

 

당신만 풀 수 있는 매듭으로 뭉뚱그린

단호한 보자기가 있어요

 

ㅡ시집 『고양이와 걷자』 2023년,

 

 


 

 

하기정 시인 / 지구본

 

 

도래하지 않은 세계를 들여다보는 것을

미래라 불렀고

뒤돌아본 세계는

과오라 불렀지

 

볼펜을 눌러쓴 우리의 자서 위에

얼룩덜룩한 자국 같은 것을

 

마니차 위에 새겨진 경전을 돌리며

돌고 도는 것을 자전이라고 믿으며

기울어진 서쪽 하늘을 경배하기도 했네

 

우리는 자운영이 핀 들판에서

함께 운동화 끈을 묶은 적이 있고

어떤 사건 안에서 모두가

혐의자로 엮이기도 했다

 

서로의 손목에 오지 않을

시간을 수갑처럼 채워 주었지

 

망원경을 쥐고서 백 미터 경주를 했지

그리고 도착한 그곳에서

우리의 윷놀이가 시작되었다

개와 돼지와 양과 소와 말 들이

명절처럼 흥청거리고

푸른 들판은 재난처럼 분주했다

 

밑돈을 모두 탕진한 도박꾼이

다시 판에 뛰어드는

돌고 도는 그것을

우리의 훗날에

또 과오라 부를 것이다

 

ㅡ시집 『고양이와 걷자』 2023년,

 

 


 

 

하기정 시인 / 화양연화

 

 

달의 뒷면을 영원히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부터

당신을 쓰기 시작했다

 

우리에게 같은 점이 있다면, 마주 본다는 것

점과 점을 이으면 그어지는 선처럼

당신이라는 얼굴의 반대쪽에

내가 서 있다

 

열 손가락의 쓸모와 발가락들의 쓸모없음을 구별하는 일이

손톱을 자를 때와 발톱을 자를 때의 포즈 같은 것

 

한 시절 우리가 입가에 피워낸 것이 연기 같은 기침이라면

죽은 나무를 가리키며 지적하는 일과

바닥을 빌미로 간신히 지탱하는 일

 

선뜻 잡지 못하고 주변을 맴도는 일을

나는 달의 공전이라 했고

당신은 지구의 자전이라 부른 것처럼

 

일 년을 하루같이 살지 말고 하루를 일 년같이 살아,

당신은 손톱을 자르며 말했지

하루를 일 년으로 쓰는 일이라면

한나절 피는 꽃을 일 년 내내 볼 수 있을 것만 같아

 

죽은 나무둥치에 느닷없이 핀 꽃처럼 한때

여름의 푸른 폭설을 두 손에

받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ㅡ시집 『고양이와 걷자』 2023년,

 

 


 

 

하기정 시인 / 종이의 기원

 

 

앞 문장을 쓰면 뒤 문장을 잃어버린다

뒤의 문장은 앞 문장을 밟고 지나간다

달의 표면을 걷듯 이야기의 중력은 사라지고

남은 것은 최초의 발자국밖에 없다

 

이미 쓴 것들의 부끄러운 체모가 떨어져 있다

너는 달을 걷고 있고, 나는 지구를 걷고 있다

우리는 빙빙 돌면서 영원한 술래잡기를

우주적으로

 

우리의 자전은 방향이 다르다는 것

백 미터를 걷는 동안

가로수가 눈앞에서 사라졌다

우리는 우주적으로

빙빙 돌면서

술래잡기의 오랜 연인들

 

남아 있는 것들은

모두 네가 가져간 것들

내가 문 건 내 꼬리였다

 

책의 맨 뒤 페이지부터

순백의 흰 페이지가 다시 태어났다

 

ㅡ시집 『고양이와 걷자』 2023년,

 

 


 

 

하기정 시인 / 뒤로 나아가는

 

 

 나는, 물 같은 시를 쓰고 있는가, 물속에서, 발을 동동 구르는가, 여름을 이루는 단단한 순간들을 나열하는 사람인가, 서열을 가르는 사람인가, 늪에 빠진 왼발을 위해 기꺼이 오른발마저 빠지는가, 아름다운 것을 가리킬 줄 아는 여섯 번째 손가락이 있는가, 그것을 새길 수 있는 뾰족함을 가지고 있는가, 모서리를 밟는 발가락이 있는가, 문 워크를 할 줄 아는가, 한 발 나갔다가 두 발 물러서는 사랑이 있는가, 터진 주머니 속에서 굴러 나온 동전을 줍기 위해 자세를 낮추는가, 굴러가서 도착할 곳이 있는가, 꿈에 꽃을 보는가, 사과를 깎으면서 뼈를 깎을 수 있는 있는가, 무를 자르면서 두부를 생각하는가, 끌고 가는 꼬리를 자를 수 있는가, 궁핍을 위한 궁리를 하는가, 불에 그을린 냄비처럼 생활이 묻어 있는가, 뒤집힌 양말처럼 다시 뒤집을 혁명이 있는가, 나는, 시를 쓰면서, 귀와 눈과 코와 입술이 뚜렷한 입체적 사랑과 구체적 결말을 예견하는가, 이 모든 눈송이를 뭉쳐 질문처럼 던질 수 있는가, 나는

 

ㅡ시집 『고양이와 걷자』 2023년,

 

 


 

 

하기정 시인 / 여분

 

 

여기 남은 것이 있다면

저녁 분꽃이 피는 장면을 바라보는 일

수박에 박힌 까만 씨만큼 꿈을 꾸는 일

씨앗을 담을 하얀 종이봉투와

묻어 둘 것들을 위해

모종삽을 사러 가는 일

여름을 이루는 말들과

잘 짜 놓은 겨울의 담요

첫눈이 손바닥에서 녹지 않고 내려와

눈사람을 만드는 일

생활의 간결한 숟가락이 놓인 식탁

온 산을 들어 올린 나무들과

선반 위의 화분들

그루터기에서 여전히 날아가는 새들

품은 알들이 모두 새가 되는 건 아니지

사랑의 격자무늬가

손가락에서 만져지겠지

그래도 남은 것이 있다면

볕 좋은 날, 대나무 채반에

잘 말린

미래의 약속처럼

 

 


 

 

하기정 시인 / 접는

 

접으면 나는, 날아가는 비행기

접으면 너는, 너라는 배

-이 종이배를 밀고 바다로 나아가야 해

다리를 접으면 생기는 무릎

접으면서 주저앉는 의자

의지할 데라곤 여기밖에 없는데

-이 통증을 베고 누워야해

재채기 한 번 했을 뿐인데

우산을 접으면 줄줄 새는 물

나에게 아름다운 상처를 준

고양이의 발톱을 그러니까 사랑하자

이 고요한 은신처 안에서 비밀의 상자를

접는 일밖에는 빈 상자 안에

빈 상자를 채워 넣는 일 밖에는

 

두 점의 폐곡선이 만날 가능성보다

당신과 나란한 평행선이 만날 수 있기를

접는

시집 『밤의 귀 낮의 입술』​(모악, 2017) 수록

 

 


 

하기정 시인

​전북 임실 출생. 본명: 하미숙. 우석대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졸업. ​2010년 《영남일보》 문학상에 〈구름의 화법〉이 당선되어 등단. 시집 『밤의 귀 낮의 입술』, 『고양이와 걷자』 출간. 2007년 5.18문학상, 2017년 작가의눈 작품상, 2018년 불꽃문학상, 2022년 시인뉴스포엠 시인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