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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손택수 시인 / 완전한 생

by 파스칼바이런 2023. 5. 31.

손택수 시인 / 완전한 생

 

 

완전히 행복했던 적은 없는 것 같다

행복의 중심에 있을 때조차 어딘가는 조금씩 불편했다

완전히 불행했던 적도 없는 것 같다

불행의 중심에 있을 때조차 대책 없는 낙관이 있었으니

 

완전히 진실했던 적은 있었나

진실의 중심에 있을 때조차 얼마간은 나를 의심하는 병을 내려놓질 못했다

완전히 진실하지 않았던 적도 없는 것 같다

위선의 중심에 있을 때조차 몸은 알고 수면장애에 시달렸으니

 

완전히 사랑했던 적도 없는 것 같다

결혼행진곡 속에 있을 때도 나는 어딘가로 도망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완전히 사랑하지 않은 적이 있었나

불을 끄지 않고 기다리는 아파트 벼랑 위의 불빛이 나의 등대였으니

 

죽을 때는 완전히 죽을 수 있다면, 깨끗한 재가 되어 타오를 수 있다면

그러나 눈을 감는 그 심각한 순간에도 의식의 한쪽은 깨어

창밖으로 스치는 구름의 말을 받아쓸 수 있다면

따라오지 않고 버티는 머리카락과 손톱과 장기 들을 기다려 줄 수 있다면

 

나란 늘 엇결 같은 것인가

엇결의 불일치로 결가부좌를 튼 것이 나인가

조금씩은 늘 허전하고, 부끄럽고, 불만스러웠으나

조금씩은 어긋나 있는 생을 자전축처럼 붙들고 회전하면서

 

-시집 『어떤 슬픔은 함께할 수 없다』에서

 

 


 

손택수 시인

1970년 전남 담양에서 출생. 경남대학 국문과 졸업. 199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 <언덕위의 붉은 벽돌집>이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호랑이 발자국』과 『목련전차』 『나무의 수사학』 『떠도는 먼지들이 빛난다』가 있음. 부산작가상, 현대시동인상, 제22회 신동엽창작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