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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수현 시인 / 그 집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5. 31.

박수현 시인 / 그 집

 그 집은 사철 겨울이었네 영지못을 메운 터에 자리한 국민주택 13호, 담쟁이넝쿨이 온몸을 뒤채며 벽마다 기어올랐다네 삐걱, 철대문을 밀었을 때 사월에도 꽃망울 틔우지 못한 목련 한 그루가 아는 체를 했네 테너가수 N선생과 치매든 모친, 집안일 하는 아주머니, 영 철들지 않을 표정의 딸이 사는 집에 나는 길고양이처럼 잠행 했다네 갓 스물, 입주 과외하던 내가 그 애에게 가르치는 것보다 그 집은 더 어려운 문제를 내게 내주곤 했다네 그 앤 자주 가출했고, 할머니가 종일 단물을 빨다 뱉은 쥬시후레쉬민트 은박지로 새를 접어 날렸다네 그 애가 접었던 종이새들이 날개를 퍼덕이는 소리였을까 저들끼리 모가지를 감고 조르며 오르는 담쟁이넝쿨들의 밀어(密語)였을까 달빛이 푸른 속눈썹을 늘이는 추운 밤이면 기울어진 가구 틈 어디선가 그 소리는 더 또렷이 새어 나왔다네 그런 밤이면 내 청춘의 페이지가 남루하게 시드는 담쟁이넝쿨 아래 나는 더 어두워져 가위에 눌렸다네

 지난밤, 어느 손이 나를 그 집에 이끌었다네 고급 빌라가 들어선 거기서 교통사고로 세상을 뜬 N선생과 반쯤 닳은 놋숟가락 같은 얼굴로 껌을 씹어대는 할머니와 볕뉘 같은 눈을 한 그 애를 스쳐 보았네 더 멀리 도망칠수록 나는 깨진 등피(鐙皮) 같은 그 집에서 더 어둡게 저물고 있었네

계간 『문파』(2022년 겨울호)

 

 


 

 

박수현 시인 / 호접란

 

 

봄엔 꽃잎들이 바람을 일으킵니다

 

목덜미가 흰 소소리바람이

한 오백 년 품었다가

다시 고쳐

띄워 보낸 짧디짧은 편지입니다

 

꽃잎 끝에 앉은 내 눈길도

날개 접은/ 한 점 바람입니다

 

 


 

 

박수현 시인 / 역광​

한 전시회에서 사람의 등만

역광으로 찍은 흑백사진들을 보았다

어떤 등은 온순하고 어떤 등은 사나웠으나

하나 같이 묵묵한 동굴처럼 어둑했다

싱싱하고 단단한 등짝이

섣달 처마에 매달린 무청처럼 가벼워지거나

가파르고 꼿꼿했던 등판이

손잡이 빠진 바라지창처럼 덜컥거리는 것은

먼 곳에서 온 낯선 저녁이

오래 골몰하며 들락거렸기 때문일 것이다

쓰다 버린 이면지 같은

숭숭 구멍 뚫린 뻘밭 같은

달의 뒤편* 같은 그곳, 한때 버슨 분홍의

순한 시간이 흐르던 혈맥이 쉬이 잡히지 않는다

초록 페인트가 벗겨진 철 대문에 기댄 애먼 봄날이나

하롱하롱 바람에 쓸려가는 꽃잎들을 바라보다가

고단한 뒤편의 이력들을 누설하고 있다

각도를 잴 수 없이 허물어진 슬픔의 집채들이

저기, 역광 속에 걸어간다

불쑥, 허리 보조기로 모자란 뒷심을 채워야

몇 걸음 떼시던 없는 엄마의 휘고 굽은 등도 지나간다

얼룩덜룩, 젖은 등판에 씌여진 자욱한 문장들 ​

제각각, 멀고 먼 부록으로 기록되어 흐른다 의식인 의식인 의식인 의식인 의식인

중심이 아니어서 더 아득하고 비릿한,

​​

*장옥관 시인의 시 제목

 

 


 

박수현 시인

1953년 대구에서 출생. 본명: 박현주. 경북대학교 사범대 영어과 졸업. 2003년 계간《시안》으로 등단. 시집으로 『운문호 붕어찜 』 『복사뼈를 만지다』 『시안』 『샌드페인팅』 등이 있음. 2011년 서울문화재단 창작기금 수혜. 2018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 창작기금 수혜. 2020년 제4회 동천문학상수상. '溫詩' 동인. 《시안》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