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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최윤정 시인 / 해변의 책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6. 1.

최윤정 시인 / 해변의 책

 

 

책머리까지 닿을 듯 파도가 밀려온다

책머리에서 하얀 포말이 솟구친다

바다 이야기는 아니고

 

해변의 시인 것도 아니지만

한 줄의 문장이 얼룩져

몇 겹의 물살로 보글거리며 번진다

 

쓸려 간 글자마다

묻은 모래는

바위섬에 도착하자마자 물보라로 솟구쳐

 

물거품이 몰려다닌다

모래빛

끝없이 몰려다니는 물거품으로

 

굴러가는 것

끝없이 가벼워져

가벼운 자리로써 너라면

 

새의 부리 적시고 가는 글자는

이제 날개를 달고

해무 속을 움직인다

 

처음 글자였던 순간을 잊은 채

푸른 잉크 뚜껑 열린 채 쏟아진 바다 위에서

잠시 홀가분해져

 

송화 가루 묻은 모래 너머

그저 가벼운 자리로써 감감해질 나라면

 

계간 『아토포스』 2023년 창간호 발표

 

 


 

 

최윤정 시인 / 펀칭기

 

 

몇 줄의 빛을 가졌는지 터지기 전엔 가늠이 잘 안 되지

왜 그다지 빛을 좇는 건지

 

발화점을 놓쳐 터지지 못한 폭죽에 묻은

그을음을 만지며 너는 중얼거린다

 

난 아직 펀칭기가 구멍을 뚫고 간 백지일지도 모르겠어

다 타버린 폭죽은 모래 무덤에 꽂혀 새털구름을 겨누고

 

슬픔의 표식처럼 명명할 이름이 많다는 건

잊혀질 구름을 적신 바다처럼 슬픈 일일까

 

초저녁 돌무덤 곁에 서면

물큰한 솔잎 냄새가 번져

 

무슨, 나무껍질 냄새나, 바다거나

말이 없어도 알 수 있는 표식들로 어스름은 다시 아득해지고

 

암퇘지 골반엔 선홍빛 자국이 번져 있곤 하지

자국이 많아서 슬픈 일도 많은 걸까

 

구멍 난 백지로 가득 찬 상자에 깔려 죽는 꿈은

깨고 나서도 숨이 잘 쉬어지지 않고

 

비좁은 골목 담벽 이그러지던 비명은

끈적한 피로 물든 불빛으로 남겨져

 

물큰한 솔잎 냄새 맡으며 놓친 연필의 저림을 다시 잡는다

상자에 담긴 펀칭기 녹슬 때까지

 

쪽지가 묻힌 해변을 구슬프게 굴러가던 암돼지 울음소리

소나무 그늘에 잠겨 감감해질 때까지

 

계간 『아토포스』 2023년 창간호 발표

 

 


 

최윤정 시인

1969년 대구에서 출생. 영남대학교 수학교육과 졸업. 2014년 《작가세계》 신인상을 통해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 『공중산책』 (2017)과 공동 산문집 『프로방스에 끼어들다』 『수박사탕 근처』가 있음. 2015년 대산문화재단 창작기금 수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