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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안상학 시인 / 소풍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6. 1.

안상학 시인 / 소풍

 

 

내사 두어 평 땅을 둘둘 말아 지게에 지고 간다

새들이 나무를 꼬깃꼬깃 접어 물고 따라나선다

벗은 이 정도면 됐지

술병을 닮은 위장 속에는 반나마 술이 찰랑이고

파이프를 닮은 허파에는 잎담배가 쟁여져 있으니

무슨 수로 달빛을 밟고 가는 이 길을 마다할 것인가

무슨 수로 햇빛을 밟고 가는 이 길을 저어할 것인가

해와 달이 서로의 빛으로 눈이 먼 이 길을 뒤뚱이며 간다

어느 날은 달의 뒤편에 자리를 펴고 앉아 지구 같은 것이나 생각하며

어느 날은 태양의 뒤편에 전을 펴고 누워

딸내미와 나같이나 불쌍한 어느 여인을 생각하며

조금씩 술을 비우고 조금씩 아주 조금씩 담배를 당긴다

그때마다 새들은 나무를 펴고 앉아 노래를 부르거나

모래주머니에 챙겨 온 콩 두어 개를 꺼내 먹는다

가끔 바람이 불어오고 잊을 만하면 걸어간다

이상하리만치 사랑하는 것들과 가까이 살 수 없는 이번 생에서 나는 가끔 꿈에서나 이런 소풍을 다녀오곤 하는데 오늘도 그랬으니 한동안은 쓸쓸하지나 않은 듯 툴툴 털고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안상학 시인 / 병산서원 복례문 배롱나무

 

남들 꽃 피울 때 홀로 푸를 일 아니다

푸름을 배워 나날이 새로워지면

안으로 차오르는 사랑

꽃처럼 마음 내며 살 일이다

벌 나비 오갈 때 간혹 쉴 자리 내주고

목 축일 이슬 한 방울 건넬 일이다

남들 꽃 피울 때 함께 피어

사만 팔만 시간 벌 나비와 함께 울 일이다

함께 춤출 일이다

세상 꽃 다 안 피운다 해도

저 홀로라도 꽃 피우며 살 일이다

때가 되면 푸르름을 여미고 꽃으로 돌아갈 일이다

 

 


 

 

안상학 시인 / 몽골 편지

 

 

독수리가 살 수 있는 곳에 독수리가 살고 있었습니다

나도 내가 살 수 있는 곳에 나를 살게 하고 싶었습니다

 

자작나무가 자꾸만 자작나무다워지는 곳이 있었습니다

나도 내가 자꾸만 나다워지는 곳에 살게 하고 싶었습니다

 

내 마음이 자꾸 좋아지는 곳에 나를 살게 하고 싶었습니다

내가 자꾸만 좋아지는 곳에 나를 살게 하고 싶었습니다

 

당신이 자꾸만 당신다워지는 시간이 자라는 곳이 있었습니다

그런 당신을 나는 아무렇지도 아니하게 사랑하고

 

나도 자꾸만 나다워지는 시간이 자라는 곳에 나를 살게 하고 싶었습니다

그런 나를 당신이 아무렇지도 아니하게 사랑하는

 

내 마음이 자꾸 좋아지는 당신에게 나를 살게 하고 싶었습니다

당신도 자꾸만 마음이 좋아지는 나에게 살게 하고 싶었습니다

 

 


 

 

안상학 시인 / 이불을 널며

 

 

우리들의 삶이

이불 한 장만한 햇살을 들이지 못한다는 것을

햇살에 말린 이불을 덮으면서 알았다

 

이내 눅눅해지는 우리들의 삶

더러 심장도 꺼내 햇살에 말리고 싶은 날이 있다

심장만한 햇살 가슴에 들이고

나날을 다림질하며 살고 싶은 날이 있다

 

 


 

 

안상학 시인 / 발밑이라는 곳

 

 

내 발밑은 나만의 공간이다

한날한시에 태어난 그 누구라도

서로의 발밑을 동시에 밟을 수는 없다

그런 의미에서 내 발밑은 언제나 나만의 신성불가침 지역이다

 

사람은 발밑을 밟으면서부터는 단독자다

여섯 살 장마철 처음 밟아 죽인 지렁이

여덟 살 여름날 뭉개버린 개미집

적어도 두 발 아래 학살까지도 책임질 줄 아는 단독자다

 

흘러간 전쟁 비망록에는 발밑을 빼앗긴 주검들이 많다

가마니 따위를 뒤집어쓴 시신의 삐져나온 발바닥

그들의 발밑을 유린한 무수한 발소리들은 건재한가

내가 알기로 전범들의 발밑도 오래지 않아 발바닥에서 이탈해갔다

 

발밑을 가진 적 없는 젖먹이와

발밑을 상실한 노인의 꼼지락거리는 발가락이 닮았다

발밑을 잠시 버리고서야 사랑을 나누는 연인들의 몸짓

발밑 없이 와서 발밑과 동행하다 발밑을 잃고서야 돌아가는 인생

때가 되면 발밑에 연연하지 않아야 될 때가 한 번은 오는 법이다

 

누구나 발밑을 밟고 사는 동안은 우선 발밑이 안전하길 기도한다

발밑은 나눌 수도 공유할 수도 없는 독자적인 것이다

세상 누구의 발밑도 건드려서는 안 된다

많은 부분 나무들에게서 배우고 익힐 필요가 있다

누구의 발밑도 신성불가침 성역이다

 

 


 

안상학 시인

1962년 경북 안동시 출생. 1988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1987年 11月의 新川' 당선. 시집 『그대 무사한가』 『안동소주』『오래된 엽서』 『아배 생각』 『그 사람은 돌아오고 나는 거기 없었네』. 2015.10. 제15회 고산문학대상 시 부문 수상. 2021년 제23회 백석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