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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성근 시인 / 장어의 맛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9. 2.

이성근 시인 / 장어의 맛

 

 

나는 뒤부터 태어났는데 왜 입 같은 게 달렸을까

할말도 없는데 쌀 것도 없는데

짠물을 내려치는 어떤 용기도 없는데

 

허파를 찌르는 게 칼인지 빗물인지 모르겠어

사각에 찰박이는 직선은 우리가 되었다가 울음이 되었다가

 

우산을 거꾸로 쓰지 않고도 돌아갈 수 있을까

살에다가 눈을 묻을게

살이 부러지면 눈에서 단물이 될 거야

비가 멈추면 아빠 혼자 돋보일 거야

 

머리는 왜 단단하게 싸여 있을까

젖을 것도 없는데 먹을 것도 없는데

내장을 헤집어도 기원 같은 건 없을 거야

 

그런데 아빠

 

태어난다는 건 무슨 맛일까

 

- 2013년 <현대시> 11월호

 

 


 

 

이성근 시인 / 서로에게 유명한 사람이 되어

 

 

 아무것도 없는 곳으로 유명하다 사가(佐賀)는 나뭇잎 아래를 혼자서 걷는 사람 누워서 햇볕을 흔드는 그늘 삼월의 빈 가지에 가라 앉은 늙은 고양이의 털끝

 

 아무도 웃지 않는 곳에서

 벚꽃은 핀다

 

 사가라는 뉘앙스에서 검지와 중지를 접고 보면 김제 같기도 한 초록의 해프닝을 연기하는 대낮의 어떤 감정 색깔들은 자주 일요일에 잠들었다가 공중에서 인사하는 꽃잎의 국적 같은 것 삼월에는 초록색 병증이 들고 오래된 료칸은 사람의 얼굴을 되돌리는 효험이 있다.

 

 월요일에 만날 수 없는 우리는 온천처럼 끓는 계절 위에다 나뭇잎을 끊어놓고선 가장 외롭고 웃긴 나무를 연기하지 아무것도 없는 곳으로 서로에게 유명한 사람이 되어 뿌리처럼 유약하고 질긴 손을 맞잡는다 나의 고요가 너의 물관에서 반짝이는 걸 본다

 

 아무도 웃지 않는 곳에서

 사가가 우윳빛 꽃을 피울 때

 

-웹진 시인광장 2016년 6월호

 

 


 

이성근 시인

1981년 서울 출생. 2013년 「시와반시」로 등단. 2017년 서울문화재단 첫책발간지원사업 선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