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김현 시인 / 떨리는 눈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9. 6.

김현 시인 / 떨리는 눈

 

 

달이 떴다

 

시간이 공중에 떠 있듯

밤이다

 

떨리는 눈으로

밝은 빛을 볼 수 없다

 

눈을 감는 일은

지속적으로 아름답다

 

떨리는 눈으로

빛의 맨발을 본다

 

잠들어 있다

 

잠들어 살아간다

빛은

 

가슴에 손을 얹는다

떨리는 것으로 그렇다

 

너는 가슴에 손을 얹는 남자구나

 

신은 지난밤

달의 눈썹을 고요히 밀어버린 전적이 있고

 

오늘

아침을 기다리지 않는 자는 죄가 없다

 

떨리는 눈으로

잠든 얼굴을 본다

 

아침이 오는 것을

듣는 얼굴, 빛

 

떨리는 눈으로

달이 떠 있다

 

지금까지는

모두 달의 일과

 

밤은 물러가지 않고

내리고 쌓인다

 

빛은 눈 뜨지 않는다

떨리는 눈으로 그걸 본다

 

시간이란 모든 떨고 있는 것

나 지금 떨고 있니?

 

그게

내려온다

 

 


 

 

김현 시인 / 리와인드Rewind

 

 

 아버지, 이제 틀니를 빼세요. 아버지는 무색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아직 배가 고프단다. 죽으러 가셔야 해요. 달력에 표시해 두었잖아요. 아버지는 붉은 동그라미를 무색하게 바라봤습니다. 아니 벌써. 아버지, 입 좀 벌리세요. 아버지의 물음은 무색하였습니다. 그런데 아들아, 너는 왜 계획적으로 사람을 죽이는 법에 대해 단 한 번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것이냐.1) 그는 마이크로소프트 보청기가 내장된 그의 인조 귀에 입술을 밀착하고 담담하게 말했다. 그는 자신으로부터 시작된 그의 대답을 귀에 담았다. 창밖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인간을 철거하기 위한 용역들이 대기 중이었다. 그는 마이크로소프트 굴절렌즈가 장착된 인조 눈을 쩝 닫았다. 사람들을 애태우는 익숙한 냄새였다. 약속 시각이 되었다. 그는 그의 붕 뜬 마이크로소프트 인조 머리칼을 얌전하게 빗겨주었다. 그는 그가 꺼내놓은 마이크로소프트 세라믹 인조 틀니를 보았다. 시대의 산물이었다. 그는 아가리를 다물었다. 지그시2) 나는 초록색 제로 유니폼을 꺼내 입고 (교양있게) 떠날 채비를 마쳤다. 창밖을 내다봤다. 그처럼 순순히 도살장으로 끌려갈 다시 한 번 세계의 입단속을 주도했던 세대들이 제로유니폼을 차려입고 일렬종대로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 죽도록 싱싱한 초록빛이었다. 과학적인 용역들은 발전된 연기를 보여줬다. 인간을 위해서 인간을 희생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사람의 애간장을 녹이는 이미지였다. 나는 그가 (교양 있게) 아버지의 죽음 을 호명하는 소리를 들었다. 계단을 내려온 나에게 그는 서류 봉투를 챙겨주었다. 정육가공용. 붉은 도장이 찍혀 있었다. 그는 문을 대문짝만하게 열었다. 나는 집을 나섰다. 그 옛날 그와 같이 먹음직스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그는 엉덩잇살 사이에 낀 팬티를 빼내며 실룩실룩 입맛을 다셨다. 버스는 뒤뚱뒤뚱 달려오고 있었다. 나는 뛰뛰빵빵 걸음을 옮기며 그에게 상냥하고 암울하게 손을 흔들어 주리라 마음먹었다. 우리는 처음으로 (교양 있게) 서로의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문은 이미 오리무중으 로 닫혀 있었다.3)

 

1) 각국에서 지구촌 살리기 정책(일명 지구촌 정비법)이 발효되었을 당시, 문장에 무색하다는 단어를 넣어 쓰는 것이 유행하였다. 이는 마이크로소프트사의 부도가 일어난 당시의 유행에 따라 기술되었다.

 

2) 지구촌 정비법 시행 이후 마이크로소프트사의 부도와 함께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인조 보형물들이 덤핑으로 시중에 유통, 판매되었다. 이는 당시의 무색한 인간상을 대체로 반영하며 기술되었다.

 

3) 본격적인 신기술복제시대의 시작과 함께 첨예해진 지구촌 살리기 정책의 무색한 교양을 문제 삼으며, 각국의 시민들 사이에서 교양있게) 괄호 치기 시위가 전개되었다. 이는 괄호치기 시위에 동참하는 구호로써 소리 내어 기술되었다.

 

 


 

김현 시인

1980년 강원도 철원 출생, 2009년 <작가세계> 신인상으로 시 등단. 시집 『글로리 홀』 『입술을 열면』 『호 시절』. 산문집 『걱정 말고 다녀와』 『아무튼, 스웨터』 『질문 있습니다』. 등. 2018. 제36회 신동엽문학상 수상. 2006.~ 여성인권영화제 프로그래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