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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암 시인 / 시인의 엄마 -손순연
입 주변까지 번진 대상포진으로 고생하는 여든 일곱의 우리 엄마 37도 무더위에도 지치지 않고 꿋꿋하다
오랜 만에 안부 전화를 드리니 “우리 선상님, 어데 멀리 외국 나가셨든게?” 이리 무더운데 요새 뭘 드시느냐 하니 “내사 하늘의 별 따다 안 묵는게.” 하신다
면구스러움에 앞서, 그 참! 초등학교도 못 나와 한글도 모르는 분이 외국 유람은 어찌 알고 하늘의 별 따다 먹는 것은 또 어찌 알꼬?
시인이랍시고 까불락대는 헐거워진 내 언어가 다시 탱탱해진다
이종암 시인 / 닻꽃
순천 김인호 시인의 페이스북에서 처음 봤다 용담과 한두해살이풀, 닻꽃 꽃 아래 갈고리 모양 네 개의 꽃받침 뭍과 바다를 배 하나로 묶어두는 닻, 꼭 그대로다
지금은 아득한 스물한 살 내 첫사랑 떠나기 전 저 닻꽃 꺾어다 줄 걸 그랬다
이젠 닻에 묶여 오도 가도 못한다 오십 넘어 잠자리에서 드르릉 드릉 같이 코를 고는 아내와 내 몸의, 닻 빼도 박도 못하게 깊이 꽂혀 있다 흔들림 없는 닻은 내 외아들이다
나와 아내 사이에서 핀 저 닻꽃! 이승과 저승 사이 단단히 박아놓은 흔들림 없는 또 하나의 닻이다
이종암 시인 / 피아노를 치던 여자 -K에게
너는 공중의 빗방울을 파종하는 구름* 이라는 어느 시인의 시구를 읽다 문득 생각났다, 오래 전 그 여자 십 년이 지나 겨우 지울 수 있었는데 장맛비로 다시 가슴이 흠뻑 젖는다
태풍 지나간 칠포해수욕장 물결무늬 모래를 밟고 먼 데를 보며 저 바다 건너서라도 길 함께 가자던 마지막 그날 너는 모래펄에 쓰러진 나무의자에 앉아 피아노를 치고 푸른 노래를 나는 불렀지
피아노 소리 바다에서 들려온다 나를 지나간 네 물결무늬 자국 쿵, 쿵, 쿵 돋을새김으로 일어선다
-시집 『붉디 붉은 호랑이』 (애지,2005)
이종암 시인 / 빈집
혼자 시간을 견디며 서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 뒷산으로 가 눕고 일곱 자식 세상으로 길러낸 집의 뼈대들 하나 둘 허물어지는 흙담이 내려앉고 외양간이 무너지고 오래된 제비집이 툇마루에 흙과 떨어져 쌓이는 텅빈집.
모시고 간다간다 하던 아버지 제사 빈 고향집에서 지낸다 큰방 아랫방 아궁이에 군불 들어가는 소리 타다탁 그러다 굴뚝 위로 연기 솟아 오르고 무너진 담벼락 위로 아버지 산소가 있는 뒷산에서 빈집으로 바람이 들어온다
이종암 시인 / 해국의 꽃잎에서 바다는 가깝다
가을도 다 지나 이제 겨울인데 해국은 아직 있을까 몰라
열사흘 달빛 아래 해국 자생지 대보 아직도 거기 꽃은 피어 있다 네게 붙들린 내 가슴처럼 피었다 가운데 달색 통꽃도 연보라 혀꽃도 덮쳐오는 해풍에 점점 스러져간 성마른 해국, 거기 너는 분명 꽃이었다 어질머리다, 아픈 사랑 달빛과 파도의 흰 소리를 베어 물고 그리 오래 기다리고 있으면 어쩌자고 바싹 마른 목마른 너를 막무가내 껴안는다
해국의 꽃잎에서 바다는 가깝다
이종암 시인 / 춤
그녀한테서 문자가 왔다 팔공산 영불암* 오르는 길, 연초록 드레스를 입은 무용수들이일제히 왈츠를 추고 있어요
어쩌란 말인가 그 왈츠의 상대는 아마도 푸른 바람이겠지 연초록 나뭇잎들이 일제히 바람과 손 맞잡고 왈츠를 춘다고, 하하 그렇게 우리도 손 맞잡고 춤추자는 것인가
부처를 맞이한다는 영불암 가는 길이니 소신공양燒身供養 몸과 마음마저 다 내어주는 사랑을 저도 알고 있는 것이겠지
춤을 추자고 한다 사랑은 끝없이 춤추는 거라고, 그녀가 대낮에 춤추는 문자를 보내왔다 골똘히, 춤 속으로 나는 걸어간다
* 그녀가 말한 팔공산 영불암은 염불암의 오기였다. 그러나 어쩌랴, 처음 그녀가 보내준 문자대로 영불암을 마음에 들고 나는 이미 이렇게 시를 써버린 것을
이종암 시인 / 홍매도 부처 연두도 부처
황사 심하던 어저께 통도사에 갔다
마음과 몸뚱어리 모래 먼지 뒤덮인 허공만 같아 대웅전 바닥에 한참 엎디어 울었다 속울음 실컷 울고 나니 내 허물 조금 보이는 것만 같다
금강계단 되돌아 나오는데 천지간 황사 밀어내며 막 눈뜨는 홍매 한 그루, 나를 꾸짖는다 암아, 암아 세상 살면서 제대로 핀 니 몸꽃 하나 가져라
산문을 나오며 바라본 먼 산 잿빛 겨울을 지우며 올라오는 연두가 또 회초리를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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