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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종암 시인 / 시인의 엄마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0. 28.
이종암 시인 / 시인의 엄마

이종암 시인 / 시인의 엄마

-손순연

 

 

입 주변까지 번진 대상포진으로 고생하는

여든 일곱의 우리 엄마

37도 무더위에도 지치지 않고 꿋꿋하다

 

오랜 만에 안부 전화를 드리니

“우리 선상님, 어데 멀리 외국 나가셨든게?”

이리 무더운데 요새 뭘 드시느냐 하니

“내사 하늘의 별 따다 안 묵는게.” 하신다

 

면구스러움에 앞서, 그 참!

초등학교도 못 나와 한글도 모르는 분이

외국 유람은 어찌 알고

하늘의 별 따다 먹는 것은 또 어찌 알꼬?

 

시인이랍시고 까불락대는

헐거워진 내 언어가 다시 탱탱해진다

 

 


 

 

이종암 시인 / 닻꽃

 

 

순천 김인호 시인의 페이스북에서

처음 봤다

용담과 한두해살이풀, 닻꽃

꽃 아래 갈고리 모양 네 개의 꽃받침

뭍과 바다를 배 하나로 묶어두는

닻, 꼭 그대로다

 

지금은 아득한

스물한 살 내 첫사랑 떠나기 전

저 닻꽃 꺾어다 줄 걸 그랬다

 

이젠 닻에 묶여 오도 가도 못한다

오십 넘어 잠자리에서 드르릉 드릉

같이 코를 고는 아내와 내 몸의, 닻

빼도 박도 못하게 깊이 꽂혀 있다

흔들림 없는 닻은 내 외아들이다

 

나와 아내 사이에서 핀

저 닻꽃!

이승과 저승 사이 단단히 박아놓은

흔들림 없는 또 하나의 닻이다

 

 


 

 

이종암 시인 / 피아노를 치던 여자

-K에게

 

 

너는 공중의 빗방울을 파종하는 구름*

이라는 어느 시인의 시구를 읽다

문득 생각났다, 오래 전 그 여자

십 년이 지나 겨우 지울 수 있었는데

장맛비로 다시 가슴이 흠뻑 젖는다

 

태풍 지나간 칠포해수욕장

물결무늬 모래를 밟고 먼 데를 보며

저 바다 건너서라도 길 함께 가자던

마지막 그날 너는

모래펄에 쓰러진 나무의자에 앉아

피아노를 치고 푸른 노래를 나는 불렀지

 

피아노 소리 바다에서 들려온다

나를 지나간 네 물결무늬 자국

쿵, 쿵, 쿵 돋을새김으로 일어선다

 

-시집 『붉디 붉은 호랑이』 (애지,2005)

 

 


 

 

이종암 시인 / 빈집

 

 

혼자 시간을 견디며 서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 뒷산으로 가 눕고

일곱 자식 세상으로 길러낸 집의 뼈대들

하나 둘 허물어지는

흙담이 내려앉고 외양간이 무너지고

오래된

제비집이 툇마루에 흙과 떨어져 쌓이는

텅빈집.

 

모시고 간다간다 하던 아버지 제사

빈 고향집에서 지낸다

큰방 아랫방 아궁이에 군불 들어가는

소리

타다탁 그러다 굴뚝 위로 연기 솟아 오르고

무너진 담벼락 위로 아버지 산소가 있는

뒷산에서 빈집으로 바람이 들어온다

 

 


 

 

이종암 시인 / 해국의 꽃잎에서 바다는 가깝다

 

 

가을도 다 지나 이제 겨울인데

해국은

아직 있을까 몰라

 

열사흘 달빛 아래 해국 자생지 대보

아직도 거기 꽃은 피어 있다

네게 붙들린 내 가슴처럼 피었다

가운데 달색 통꽃도 연보라 혀꽃도

덮쳐오는 해풍에 점점 스러져간

성마른 해국, 거기 너는 분명 꽃이었다

어질머리다, 아픈 사랑

달빛과 파도의 흰 소리를 베어 물고

그리 오래 기다리고 있으면 어쩌자고

바싹 마른 목마른 너를

막무가내 껴안는다

 

해국의 꽃잎에서 바다는 가깝다

 

 


 

 

이종암 시인 / 춤

 

 

그녀한테서 문자가 왔다

팔공산 영불암* 오르는 길, 연초록 드레스를 입은

무용수들이일제히 왈츠를 추고 있어요

 

어쩌란 말인가

그 왈츠의 상대는 아마도 푸른 바람이겠지

연초록 나뭇잎들이 일제히 바람과 손 맞잡고

왈츠를 춘다고, 하하

그렇게 우리도 손 맞잡고 춤추자는 것인가

 

부처를 맞이한다는 영불암 가는 길이니

소신공양燒身供養

몸과 마음마저 다 내어주는 사랑을

저도 알고 있는 것이겠지

 

춤을 추자고 한다

사랑은 끝없이 춤추는 거라고, 그녀가

대낮에 춤추는 문자를 보내왔다

골똘히, 춤 속으로 나는 걸어간다

 

*

그녀가 말한 팔공산 영불암은 염불암의 오기였다.

그러나 어쩌랴,

처음 그녀가 보내준 문자대로 영불암을 마음에 들고

나는 이미 이렇게 시를 써버린 것을

 

 


 

 

이종암 시인 / 홍매도 부처 연두도 부처

 

 

황사 심하던 어저께 통도사에 갔다

 

마음과 몸뚱어리

모래 먼지 뒤덮인 허공만 같아

대웅전 바닥에 한참 엎디어 울었다

속울음 실컷 울고 나니

내 허물 조금 보이는 것만 같다

 

금강계단 되돌아 나오는데

천지간 황사 밀어내며 막 눈뜨는

홍매 한 그루, 나를 꾸짖는다

암아, 암아 세상 살면서

제대로 핀 니 몸꽃 하나 가져라

 

산문을 나오며 바라본 먼 산

잿빛 겨울을 지우며 올라오는

연두가 또 회초리를 든다

 

 


 

이종암 시인

1965년 경북 청도 출생, 영남대학교 국어교육과 졸업. 1990년 천마문화상 문학평론부문 당선, 1993년 계간<사람의 문학>과 《포항문학》을 통해 등단. 시집 『물이 살다 간 자리』 『저, 쉼표들』. 현재 시동인 '푸른시' 회원으로 활동 中. <포항문학> 편집위원, 포항예술문화연구소(Art Forum) 회원, 민족문학작가회의 경북지회 사무국장, 현재 포항 대동고등학교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