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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요아킴 시인 / 여기. 지금의 행복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0. 28.
김요아킴 시인 / 여기. 지금의 행복

김요아킴 시인 / 여기. 지금의 행복

 

 

언제 들려올지 모를 집주인의 목소리에

유목遊牧을 해야 할 긴장감이 있어야 해

매일매일 출근길에 화들짝 끼어드는 차 뒤꽁무니의

놀람도 있어야 해

분필가루 묻어나는 고함에도 달콤한 잠을 챙기는

반 아이들 넉살로 있어야 해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지 않는다는 마누라의 역정과

수눙을 앞둔 딸아이의 짜증은 덤으로 있어야 해

월급이 찍힌 다음날 지치지도 않고 증발하는

통장 숫자들의 나열도 있어야 해

늦은 귀갓길 요행히 찾은 주차공간에 선을 넘겨버린

이웃 얌체들도 있어야 하고

또 하루를 송출하는 브라운관 속 찌질한 위정자들의

코미디도 있어야 해

남의 시를 엄청난 잣대로 침 튀기는 한 젊은 평론가의

오독誤讀도 있어야 하고

가끔씩 아주 가끔씩은 내 글을 알아주는

청탁의 반가움도 있어야 해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하며 통화한 고향 엄마의

짠한 소리도 있어야 해

변함없이 위층의 쿵쿵거림으로 찾아오는 주말의

설렘도 있어야 하고

유니폼으로 갈아입은 일요일 아침 멋진 안타를 꿈꾸며

마시는 자판기 커피의 단맛도 있어야 해

그리고 하늘의 명을 안다는 그림자의 온갖 세레머니

마땅히 받아줄 그런 홈이 있어야 해

 

 


 

 

김요아킴 시인 / 경계

 

 

고담봉 금샘이 넘쳐흘러

해지는 곳으로 이르는 대천천을 끼고

남과 북은 나뉜다

 

쉽사리 건널 수 있는 다리의

저 끝과 끝의 이름은 서로 다르다

 

콘크리트 평수와 교환가치는

애초부터 달랐다

 

아이들 머릿속에도 전생처럼

경계가 지어졌고, 또 경계를 했다

 

내가 자는 머리맡은 당연히 남쪽을 원했고

집 이름도 그쪽을 본 땄다

 

누구나 밤마다 산책을 하고

하얀 달이 뜨면 삼삼오오 몰려드는 대천천, 그 경계에

한 건물이 자리해 있다

 

잿빛 가사를 입은 꼭대기 층의 사내와

그 아래층 로만칼라의 사내가 동거를 한다

 

음력 사월의 크리스마스 트리와 양력 12월의 연등이

1층의 다이소 불빛처럼 환하다

 

 


 

 

김요아킴 시인 / 초량, 소녀 앞에 서다

 

 

밀봉된 역사가 천 번의 외침으로

물의 날, 단발머리 소녀로

환생하였다

 

맨발의 울음을 삼키고 별이 된

하얀 적삼들은 갈 곳을 몰라

늘 뒤꿈치를 들었다

 

숨소리조차 유배되는 이 땅의

조직적인 난청에

낡고 여윈 그림자

 

노랑나비만이

생을 건너 뛸 날갯짓으로

곧잘 피어올랐다

 

현해탄이 몰고 오는 비릿한 바람

소스라칠 듯 이곳, 초량의

붉은 깃발을 요동치게 했다

 

제국의 부활이 망령처럼 떠돌고

눈 먼 자들의 맹신적 제의가

흉물스럽게 방치되곤 했다

 

그럴 때마다 방년의 세월만큼

두 손을 꼭 쥔 채, 오롯이

시대의 화두를 정면으로 붙잡았다

 

불온한 왼쪽 어깨 위론, 이미

진실을 타진할 새 한 마리가

신에게 준비되었다

 

다만 비워 놓은 옆자리엔

그때 그 소녀들이 흔들림 없이

배심원으로 앉아 있었다

 

 


 

 

김요아킴 시인 / 라면論

 

 

양철처마의 빗소리가 끓는 점이 되어

가난의 식욕을 자극하던 장판 위로

마분지보다 두껍게, 슬쩍

시집 표지(表紙)가 보시를 한다

시대를 달구었던 한 노래의 뜨거움이

더한 뜨거움을 받아내는 순간,

양은냄비엔 굽은 길들이 숨어있었다

바라는 대로 풀리지 않는, 그래서

약간의 비겁이 면발들 사이로

짠하게 배어들었다.

휘이-휘이 저어도 젓가락으론

감당할 수 없을, 미로 같은 원죄가

옥탑방 골목처럼 꼬들꼬들 했다.

'곧은 소리는 소리이다'

이 한 줄의 詩를 간음하며

자유로이 낙하하는 계란 노른자의

혁명을 꿈꾸었다

보안등 불빛아래, 낮술에 취해 걸려있는

주인집 아재의 고함과

징징대는 딸아이의 울음이

냄비뚜껑의 달그락거림으로 다가올 때

한 줄 한 줄 건져 올린 그 맛엔

엷게 저민 습기가 묻어난다

여전히 비어있는 밥그릇, 총각 무 같은

고향의 그 발그스름한 노을로

슬그머니 입맛을 마무리 한다

 

ㆍ인용된 부분은 김수영 시인의 시 '폭포'의 한 구절임.

 

 


 

 

김요아킴 시인 / 노르웨이 숲 옆 푸르지오

 

 

불완전한 사람들이 불완전한 세계에서

불완전한 방식으로 살아간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글 중에서

 

비틀즈의 노래를 부르며

노르웨이 숲 옆으로 이주를 했어요

 

평평한 저 아랫동네에서

제가 발 디딜 곳은 없었어요

 

잠자리를 같이하는 여자와 새끼들을 데리고

매번 유목민처럼 떠돌아야 했어요

 

비옥한 땅이 자본으로 전제되는

젖과 꿀이 흐르는 신도시의 유혹이

매번 발목을 잡으며 속삭였죠

 

자, 문을 열고 나서봐, 뭐든지 얻을 수 있어

달보다 환한 저 불빛과 화려한 간판이

네 영혼을 살찌울 거야, 그래

잠까지 줄여가며 더 힘껏 일해 봐

 

하지만, 편하게 누워야 할 방마저

주인의 단 한마디에 뺏겨버리는, 밤마다

그때 노래를 들었어요, Norwegian Wood

 

우리가 얼만큼 호흡하며 살지, 무엇이 참 기쁨이고 행복인지

상실의 시대, 동쪽 숲 바로 너머 이곳에서

이 노랠 꼭 부르고 싶었어요

 

 


 

 

김요아킴 시인 / 바다상회

 

 

바다상회의 주인은 바다다

 

재생되는 내 기억의 필름 속에서

늘 손님을 맞고 있다

 

그 한 평 남짓한 자리에서

조수 간만의 차이만큼을 버텨내고 있다

 

이른 새벽에서 늦은 밤 귀갓길까지

햇빛과 형광등을 달리하며

세월을 소금에 절이고 있는 것이다

 

뱃고동처럼 웅웅거리는 녹슨 냉장고 속은

캔버스의 정물화로 놓여지고, 가끔씩

수면 위로 솟아오르는 몇몇의 날갯짓에

바다는 파리채를 흔든다

 

간혹 누군가 흘리고 간 막걸리는

허연 폐수로 밀려와 좁은 해변을 더 밀어내고

빵 봉지마냥 부푼 섬이, 납작

바다에 엎드려 자맥질을 한다

 

저 멀리 뒷산이 파라솔처럼 고운 그늘을 펼치면

반질반질한 계산대 탁자 모서리로

반짝거리는 나의 손때가 더해진다

 

바다상회의 손님이 바다가 된다

 

 


 

 

김요아킴 시인 / 야구장으로 입장하시라

 

 

마음이 시대를 붙잡지 못할 때

야구장 외야석 한켠으로 가보라

 

둘이 아닌 혼자, 어린 시절

소풍 때나 먹어봤을 김밥 두 줄과

한 병의 탄산수를 짊어지고

전광판 옆 구석진 곳에 앉아보라

 

추억의 색깔로 채색된 그라운드 위

공수가 평등하게 분배되는 게임의 논리를

하나 둘 켜져 오는 조명등처럼

마음껏 속으로 분양해 보라

 

반드시 한 쪽 귀에는

한 쪽 목소리만 내는 아나운서의 수다를 꽂고

사방을 눈치 보며 늘 견뎌내야 할 고단함을

잠시나마 망각해 보라

 

평소 금방이라도 입술에서 허락될 숫자만큼

엎치락 뒤치락 플레이를 펼치는

그 곳의 함성은 생의 영원한 소도(蘇塗)

치어리더의 주술적인 춤동작은 덤으로 생각 하라

 

마음이 가끔씩 시대를 따라가지 못할 땐

야구장으로 한번 입장권을 내밀어 보라

 

 


 

김요아킴 시인

1969년 경남 마산 출생. 경북대 사대 국어교육과를 졸업. 2003년 계간 《시의나라》와 2010년 계간 《문학청춘》 제1회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가야산 호랑이』 『어느 시낭송』 『왼손잡이 투수』 『행복한 목욕탕』 『그녀의 시모노세끼항』. 산문집 『야구, 21개의 생을 말하다』. 한국작가회의와 부산작가회의 회원, 현재 부산 경원고등학교 국어교사로 재직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