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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요아킴 시인 / 여기. 지금의 행복
언제 들려올지 모를 집주인의 목소리에 유목遊牧을 해야 할 긴장감이 있어야 해 매일매일 출근길에 화들짝 끼어드는 차 뒤꽁무니의 놀람도 있어야 해 분필가루 묻어나는 고함에도 달콤한 잠을 챙기는 반 아이들 넉살로 있어야 해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지 않는다는 마누라의 역정과 수눙을 앞둔 딸아이의 짜증은 덤으로 있어야 해 월급이 찍힌 다음날 지치지도 않고 증발하는 통장 숫자들의 나열도 있어야 해 늦은 귀갓길 요행히 찾은 주차공간에 선을 넘겨버린 이웃 얌체들도 있어야 하고 또 하루를 송출하는 브라운관 속 찌질한 위정자들의 코미디도 있어야 해 남의 시를 엄청난 잣대로 침 튀기는 한 젊은 평론가의 오독誤讀도 있어야 하고 가끔씩 아주 가끔씩은 내 글을 알아주는 청탁의 반가움도 있어야 해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하며 통화한 고향 엄마의 짠한 소리도 있어야 해 변함없이 위층의 쿵쿵거림으로 찾아오는 주말의 설렘도 있어야 하고 유니폼으로 갈아입은 일요일 아침 멋진 안타를 꿈꾸며 마시는 자판기 커피의 단맛도 있어야 해 그리고 하늘의 명을 안다는 그림자의 온갖 세레머니 마땅히 받아줄 그런 홈이 있어야 해
김요아킴 시인 / 경계
고담봉 금샘이 넘쳐흘러 해지는 곳으로 이르는 대천천을 끼고 남과 북은 나뉜다
쉽사리 건널 수 있는 다리의 저 끝과 끝의 이름은 서로 다르다
콘크리트 평수와 교환가치는 애초부터 달랐다
아이들 머릿속에도 전생처럼 경계가 지어졌고, 또 경계를 했다
내가 자는 머리맡은 당연히 남쪽을 원했고 집 이름도 그쪽을 본 땄다
누구나 밤마다 산책을 하고 하얀 달이 뜨면 삼삼오오 몰려드는 대천천, 그 경계에 한 건물이 자리해 있다
잿빛 가사를 입은 꼭대기 층의 사내와 그 아래층 로만칼라의 사내가 동거를 한다
음력 사월의 크리스마스 트리와 양력 12월의 연등이 1층의 다이소 불빛처럼 환하다
김요아킴 시인 / 초량, 소녀 앞에 서다
밀봉된 역사가 천 번의 외침으로 물의 날, 단발머리 소녀로 환생하였다
맨발의 울음을 삼키고 별이 된 하얀 적삼들은 갈 곳을 몰라 늘 뒤꿈치를 들었다
숨소리조차 유배되는 이 땅의 조직적인 난청에 낡고 여윈 그림자
노랑나비만이 생을 건너 뛸 날갯짓으로 곧잘 피어올랐다
현해탄이 몰고 오는 비릿한 바람 소스라칠 듯 이곳, 초량의 붉은 깃발을 요동치게 했다
제국의 부활이 망령처럼 떠돌고 눈 먼 자들의 맹신적 제의가 흉물스럽게 방치되곤 했다
그럴 때마다 방년의 세월만큼 두 손을 꼭 쥔 채, 오롯이 시대의 화두를 정면으로 붙잡았다
불온한 왼쪽 어깨 위론, 이미 진실을 타진할 새 한 마리가 신에게 준비되었다
다만 비워 놓은 옆자리엔 그때 그 소녀들이 흔들림 없이 배심원으로 앉아 있었다
김요아킴 시인 / 라면論
양철처마의 빗소리가 끓는 점이 되어 가난의 식욕을 자극하던 장판 위로 마분지보다 두껍게, 슬쩍 시집 표지(表紙)가 보시를 한다 시대를 달구었던 한 노래의 뜨거움이 더한 뜨거움을 받아내는 순간, 양은냄비엔 굽은 길들이 숨어있었다 바라는 대로 풀리지 않는, 그래서 약간의 비겁이 면발들 사이로 짠하게 배어들었다. 휘이-휘이 저어도 젓가락으론 감당할 수 없을, 미로 같은 원죄가 옥탑방 골목처럼 꼬들꼬들 했다. '곧은 소리는 소리이다' 이 한 줄의 詩를 간음하며 자유로이 낙하하는 계란 노른자의 혁명을 꿈꾸었다 보안등 불빛아래, 낮술에 취해 걸려있는 주인집 아재의 고함과 징징대는 딸아이의 울음이 냄비뚜껑의 달그락거림으로 다가올 때 한 줄 한 줄 건져 올린 그 맛엔 엷게 저민 습기가 묻어난다 여전히 비어있는 밥그릇, 총각 무 같은 고향의 그 발그스름한 노을로 슬그머니 입맛을 마무리 한다
ㆍ인용된 부분은 김수영 시인의 시 '폭포'의 한 구절임.
김요아킴 시인 / 노르웨이 숲 옆 푸르지오
불완전한 사람들이 불완전한 세계에서 불완전한 방식으로 살아간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글 중에서
비틀즈의 노래를 부르며 노르웨이 숲 옆으로 이주를 했어요
평평한 저 아랫동네에서 제가 발 디딜 곳은 없었어요
잠자리를 같이하는 여자와 새끼들을 데리고 매번 유목민처럼 떠돌아야 했어요
비옥한 땅이 자본으로 전제되는 젖과 꿀이 흐르는 신도시의 유혹이 매번 발목을 잡으며 속삭였죠
자, 문을 열고 나서봐, 뭐든지 얻을 수 있어 달보다 환한 저 불빛과 화려한 간판이 네 영혼을 살찌울 거야, 그래 잠까지 줄여가며 더 힘껏 일해 봐
하지만, 편하게 누워야 할 방마저 주인의 단 한마디에 뺏겨버리는, 밤마다 그때 노래를 들었어요, Norwegian Wood
우리가 얼만큼 호흡하며 살지, 무엇이 참 기쁨이고 행복인지 상실의 시대, 동쪽 숲 바로 너머 이곳에서 이 노랠 꼭 부르고 싶었어요
김요아킴 시인 / 바다상회
바다상회의 주인은 바다다
재생되는 내 기억의 필름 속에서 늘 손님을 맞고 있다
그 한 평 남짓한 자리에서 조수 간만의 차이만큼을 버텨내고 있다
이른 새벽에서 늦은 밤 귀갓길까지 햇빛과 형광등을 달리하며 세월을 소금에 절이고 있는 것이다
뱃고동처럼 웅웅거리는 녹슨 냉장고 속은 캔버스의 정물화로 놓여지고, 가끔씩 수면 위로 솟아오르는 몇몇의 날갯짓에 바다는 파리채를 흔든다
간혹 누군가 흘리고 간 막걸리는 허연 폐수로 밀려와 좁은 해변을 더 밀어내고 빵 봉지마냥 부푼 섬이, 납작 바다에 엎드려 자맥질을 한다
저 멀리 뒷산이 파라솔처럼 고운 그늘을 펼치면 반질반질한 계산대 탁자 모서리로 반짝거리는 나의 손때가 더해진다
바다상회의 손님이 바다가 된다
김요아킴 시인 / 야구장으로 입장하시라
마음이 시대를 붙잡지 못할 때 야구장 외야석 한켠으로 가보라
둘이 아닌 혼자, 어린 시절 소풍 때나 먹어봤을 김밥 두 줄과 한 병의 탄산수를 짊어지고 전광판 옆 구석진 곳에 앉아보라
추억의 색깔로 채색된 그라운드 위 공수가 평등하게 분배되는 게임의 논리를 하나 둘 켜져 오는 조명등처럼 마음껏 속으로 분양해 보라
반드시 한 쪽 귀에는 한 쪽 목소리만 내는 아나운서의 수다를 꽂고 사방을 눈치 보며 늘 견뎌내야 할 고단함을 잠시나마 망각해 보라
평소 금방이라도 입술에서 허락될 숫자만큼 엎치락 뒤치락 플레이를 펼치는 그 곳의 함성은 생의 영원한 소도(蘇塗) 치어리더의 주술적인 춤동작은 덤으로 생각 하라
마음이 가끔씩 시대를 따라가지 못할 땐 야구장으로 한번 입장권을 내밀어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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