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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일만 시인 / 망막수술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0. 28.
박일만 시인 / 망막수술

박일만 시인 / 망막수술

 

 

수십 년을 혹사시켰으니

당연한 처사겠다

건조하고 까칠한 속내를 보이더니

종내는 파업을 시도했다

제 몸을 가르고 피를 토하더니

딱! 문을 닫아 걸은 왼쪽 눈

좌이지만

좌편향도 우편향도 가리지 않고

기울기를 조절해주던 눈

언제나 동등하게 나를 이끌던 네가

조용히 직장을 폐쇄했다

문 닫고 마음 닫은 속 깊은 불만

예고 없이 나를 안개 속으로 밀어 넣은 저항심,

노력봉사에 임금체불까지 겹쳤으니

나로서는 함구무언이다

속절없이 저물었으니 시름만 깊어진다

제 스스로 할복하고 생피를 뿌리며

파업을 시도한 왼쪽 눈,

균형을 잃은 오른쪽 눈이 전력투구한다

그도 아프다

 

 


 

 

박일만 시인 / 경전

 

 

낚시꾼이 수면을 읽는다

물속을 종일 해독하는 중이다

페이지를 수 없이 넘겨도

바닥에 깔린 진리는 좀처럼 깨달을 수 없어

번번이 물고기만 오리무중이다

물빛이 눈부신 건 그 아래에

무수히 많은 표리가 있기 때문일 것인데

무엇 하나 세상에 능통할 혜안도 없고

숨겨져 있는 문장 하나 제대로 찾아내지 못한다

얼마나 읽어내야 할 삶인지

이 나이 먹도록 한 줄도 깨달은 게 없다

물속에서 허우적대며 잡고기마저 놓치는

낭패감만 안고 여기까지 흘러왔다

응시하는 세상의 물빛 눈부셔! 눈부셔!

그 마저도 제대로 섭렵하지 못하고

온 생을

겉표지만 해독하고 있을 뿐인

나는,

 

 


 

 

박일만 시인 / 아버지 목욕을 시켜드리며

 

 

자꾸만 기우는 몸을

벽에 세워드리고 등을 민다

구순 넘어 거동 불편하신 아버지

뼈 삭고 근육 무너지는 동안 상처투성이다

가죽 처진 소처럼

늘어진 등판에 무늬가 새겨져있다

강 무늬, 산 무늬, 나무, 돌, 비바람 무늬까지

무수하다

저 등과 어깨로 버텨온 무게가 얼마던가

살을 발라 식솔들 먹여 온 세월 얼마던가

짚고 선 벽은 평생을 두고

맨살로도 넘지 못하신 꿈이다

눈치 채지 못하는 사이

태생으로 돌아가고 계신다

내외하시듯 돌아서 있는 뒤태가 애처롭다

물기를 닦아드려도 또다시 기우는 몸,

아버지 몸에서는 무궁화꽃 향기가 난다

노구를 씻겨드린 밤

꿈속에서 내 팔다리도 가늘어져 갔다

 

 


 

 

박일만 시인 / 뼈의 속도

 

 

시간을 수없이 접었다 펴가며

반듯한 철로에서도 뒤뚱댄다

험준한 산길을 만날 때마다

쉼 없이 허리를 꺾어대야 하는 몸

세상을 건너 시절을 건너 혈을 짚어가면서

뼈를 한 치씩 늘였다 줄여 가면서

종점에서 시작, 늘 종점에서 끝난다

주렁주렁 식솔들에게 등을 내주고

길고 고단하게 달려야만 하는 몸은 태생부터

속도라는 패에 온 생을 걸었다

칸칸이 바람으로 가득한 속도는 뼈의 아비들

삐걱대는 관절을 마디마디 이어 붙인 남루한 골격

달리다 멈출 때마다 허리의 통증은 더해진다

흐트러지지 않는 모습인 줄 알았던 세상 모든 아비들이

가끔 자리 펴고 누워 앓는 소리를 내는 연유도

속도가 지켜 내는 올곧음 때문.

속도와 한 몸인 아비들

역마다 부려 놓은 허기를 되삼켜 가며

해지고 캄캄한 어둠 속에서도 전복되지 않으려고

뒤척이는 속도를 줄이지 못하는 내력,

속도는 세상의 아비들

 

 


 

 

박일만 시인 / 지구의 저녁 한때 4

 

 

애들이 장성한,

이제는 머리 희끗한 나이에 이른 나를

어머니는 여전히 젖살 붙은 애로 보신다

저녁 밥상에 생선 한 토막.

한사코 내 앞에 두신다

 

괘념치 말고 드시라고 밀쳐 내도 어느새

내 쪽으로 놓여지는 생선 한 토막

 

보릿고개 넘던 시절을 떠올리시는지

무엇보다 귀한 음식이라 여기시는지

늘그막의 아들이 아직도 어머니는

안쓰러운 것이다

 

연세는 저녁에 닿아 있으나

마음은 아직 중천에 정박해 계신다

 

-제가 요즘엔 생선이 영 안 땡겨요 어머니!

재차 밀어 놓는다

 

네댓 개의 반찬 그릇이 다 비어가도

덩그러니 남는

생선 한 토막

 

 


 

 

박일만 시인 / 숯

 

 

뼛속까지 화기를 받아냈다

검다고 비웃을 것이냐

 

막막하고 긴 시간 속에서

뜨거움을 통째로 들이 마시고

까마득히 숨을 멈춰야 온전한 생이리라

 

온몸을 불구덩이에 던지고 누워

치명적으로 견뎌야 다시 숲을 이루는 나무

절정에서 머뭇대다가는 허망한 재가 되고 만다

검다고 거부할 것이냐

 

달궈진 채 조용히

석탄처럼 깊어진 몸

검을수록 생을 맑은 소리를 품으리라

 

이 세상에 알몸으로 와

삶의 화탕지옥을 지나고 나면

나의 뼈들도 종내는 저런 색이 되기나 할는지

 

검다고 버릴 것이냐

 

 


 

 

박일만 시인 / 상처가 사람의 무늬를 만든다

 

 

포경수술을 하고 온

중학교 삼 학년

아들 녀석을 보고 우리 부부는

웃었다

투정과 장난기 덕지덕지 하던 얼굴

온데 간데 없고

제법 근엄한 미륵불 같았다

산전수전 다 겪은 듯

무거운 얼굴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 소리 없는 등짝을 타고

들바람, 산구름, 눈, 비 들이치고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빠르게 건너가고 있었다

한참이 지나도 예전 그 모습

돌아오지 않아 웃었다

녀석,

깊어지고 있었다.

 

 


 

박일만 시인

전북 장수 출생.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예창작과정(詩) 수료. 2005년 《현대시》를 통해 등단. 제5회 <송수권 시문학상>․ 제6회 <나혜석 문학상> 수상. 시집 『사람의 무늬』 『뿌리도 가끔 날고 싶다』 『뼈의 속도』 『살어리랏다(육십령)』 등. 한국작가회의, 한국시인협회, 전북작가회의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