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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경 시인 / 국민학교
겨울이 다가올 무렵, 운동장에 흰 눈이 푹푹 내리고 4교시가 오기도 전, 교실 가득히 데워지는 밥 내음 난로에 갈탄을 넣고 양은 도시락을 번갈아 올려놓지만 새까맣게 타는 일도 부지기수 산골 아이들은 가져온 고구마 감자를 구우며 우리의 겨울은 수업보다 추억 쌓기에 눈 내리는 줄 몰랐네 마가린을 두른 도시락 밑, 김치와 계란말이는 누구의 것도 아닌 우리 모두의 추억 눈이 팡팡 내리고 운동장 동무들은 눈송이처럼 동글동글해졌다네.
이철경 시인 / 중력
시 토론 모임을 이끌어 오던 K시인이 2차 뇌종양 수술 후 악화된 증상의 회복을 위해 쫑파티 이후, 무기한 쉬기로 했네 함께 했던 아름다운 시절만이 절실한 기억으로 남는 건 아닌 듯, 방귀가 오직 살아있는 사람의 내장에서 만들어지는 가스인 것처럼 고통과 분노 허무를 공유하며 서로의 상처를 보듬는 시간이었네 K시인이 쓰러지거나 주저앉더라도 살아 있으므로 위안이 되었네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바닥에 쓰러져 일어나려 안간힘 쓰는 K시인을 보았네 수시로 넘어지고 의지와 상관없이 끌어당기는 중력이 무섭게 느껴지는 순간, 시시포스 신화처럼 쉼 없이 넘어져도 또다시 일어설 날을 고대하네
-시집 『한장판 인생』, 2020. 실천문학
이철경 시인 / 제1구역 재개발 골목
온기마저 잃은 쪽방 모퉁이에도 목련은 피고 지는데 독거(獨居)의 아랫목은 식은 지 오래 혈기왕성했던 꽃들과 달리, 하나둘씩 생을 놓는 저 거친 삶의 종착지 고독했던 사람은 더 고독해지고 눈물지던 사람 더 큰 슬픔에 흐느끼는 인적 끊긴 봄밤의 절규가 골목마다 아우성이다
저 힘없이 고개 떨구던 꽃들은 참회의 눈물로 누군가는 서럽게 울다가 생을 놓는 일이 허다하다 제각기 변명을 바람 앞에 늘어놓으며 죽음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지만, 처음 버려진 골목을 떠나지 못하는 유기견처럼 목련꽃 난자한 바닥에 깨진 달빛마저 처절하다
이철경 시인 / 시골 장터 좌판
금관의 여왕이 머물던 왕년의 의자인가 빛나던 권좌에서 떨어진 그녀는 터를 뒤로한 채, 좌판의 구석진 모퉁이에 쭈그리고 앉는다 허리춤 깊숙이 숨겨 놓은 왕년의 꿈이 담긴 전대에서 궐련을 꺼내 말아 피운다 한 모금씩 필 때마다 쭈그러진 입에서 순백의 꿈들이 허공으로 사라진다 회상 속 추억이 뭉게구름처럼 덧없이 흘러간다 저기 잠시 권좌를 비운 사이,
붉은 대야 안, 가득 담긴 다슬기가 아우성이다
이철경 시인 / 칼끝
막막한 어둠 속, 날카로운 칼끝이 막다른 문에 부딪히며 번득이는 찰나의 빛과 소리에 칼보다 작아지는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우리는 모두 칼끝의 두려움에 놓여 있다. 소속 단체의 칼끝, 궁핍한 굴레로 되돌아갈 칼끝, 사회 안전망에서 비껴 있는 칼끝, 바이러스 창궐의 칼끝, 검사가 휘두르는 망나니 칼끝, 거짓 뉴스에 실린 칼끝, 거대 제국주의 칼끝, 우리는 모두 막다른 미닫이에 기대어 던지는 칼날을 피하며 하루하루 근근이 사는 것이다. 미소를 띠며 던진 칼날에 심장이 찔려 피 흘리다 죽는 경우를 무수히 목격한다.
이철경 시인 / 홈리스
도시 한복판 가장 비싼 공간을
무단으로 점유한
자유라는 저 사내,
해가 들지 않는 지하보도 길옆에
하루 한 번씩
집을 짓고 부순다
-시집 <한정판 인생>에서
이철경 시인 / 귀향
신도시 주변이 된 구도심은 도시 재생 사업으로 안간힘을 쓰지만 썰물처럼 빠져나간 도심 공동화로 떠나지 못하는 가난한 사람들과 떠나갈 새들이 황량한 광장을 거닐 뿐,
고갈비 안주에 막걸리 한 사발로 취기가 오르던 왕년의 구도심엔 더 이상 청춘의 웃음이 들리지 않는다 한때를 주름잡던 추억을 곱씹는 초로의 보헤미안이 간간이 눈에 띌 뿐이다
구도심 주변은 폐쇄된 상점들과 무료한 시간을 햇살에 태우는 노인과 아무도 반기지 않는 늙은 비둘기가 한가로이 가을볕을 핥고 KTX가 서지 않는 광주역에 늘어선 코스모스만 가을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고향 신작로를 달리는 버스가 마을 어귀에 도착하면 시골 노인들 안전을 위해 부축하거나 앉기를 기다려주듯, 열차는 극락강역에 서서히 정차하고 한참을 기다리다 조심스럽게 출발한다
극락이 가까울수록 속도보다는 시골길 먼지 풀풀 날리며 세월을 낚는 풍경처럼 고즈넉할 뿐 속도를 뒤로한 채 안락에 팔을 걸치고 아스라한 기적에 간이역 지나다 보면 한낮 고향 구름이 환하게 반긴다
이철경 시인 / 이명의 기원
휴전선 너머 수복지 전방 일상과 공명하던 종소리 155마일 곡사포 탄피로 만든 전쟁고아를 위한 집단시설의 오랜 세월 녹슨 탁한 종소리
유년을 지나 청소년기를 거쳐 공단으로 던져지기 전까지 가장 고통스러운 소리로 각인된 환청 같은 종소리
그 소리 벌판을 지나 강가를 울리면 감전된 물고기처럼 심장이 찰나에 멈춰버리는 나를 울리던 종의 기원 여전히 그 소리, 이명 되어 울리네
-『미래시학』 2021-가을(3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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