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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전형철 시인 / 화무십일홍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0. 28.
전형철 시인 / 화무십일홍

전형철 시인 / 화무십일홍

 

 

사는 동안

한 번도 꽃피우지 못한 채

죽어 간 목숨에 비한다면 다행스러워라

네 몸의 꽃이 되어 네 몸의 잎이 되어 한 몸이 되었으니

짧은 날 목숨 다한 내 사랑 그 찰나만을 탓하시라

 

제아무리 고운 꽃도

열흘 붉은 것이 없다 하나

그 한 잎 그 사소한 꽃잎 한 장, 하루를

살아도 함께 한 사연 깊어

꽃 지고 잎 져도 남은 날 함께 할 목마른 그리움을 안다면

지는 꽃, 그 비장함에 대하여 서둘러 말하지 마시라

 

-詩나무 동인집 <인디언 기우제>

 

 


 

 

전형철 시인 / 송정

 

​바다에 섰다

​지구가 조금씩 깨지고 있다

​익숙한 것보다는 무서운 것이 길들이기에 편하다

​떨어지는 별을 삼킨 눈에

​순록의 순은 순함이 아니라 길들임이다

​길들이는 중인 물의 혀와 스윙 댄스 추는 밤

​바깥은 언제나 매혹적이어서

​안쪽은 품거나 깊숙이 숨겨둔다

​날아다니는 새를 잡아 공중에 박아두고

​눈을 감는다

​호수도 바다도 지구 위에서 보면 너른 거울이다

​보석이 구르는 소리 격벽을 투명하게 만든다

​한 발짝 나아가면 끝일

​뭍의 벼랑에서, 물의 전초에서

​쓸모없는 바람과

​바다에 섰다

​​

ㅡ계간 《시인시대》(2024, 봄호)

 

 


 

 

전형철 시인 / 보름달에 대한 소고遡考

- 발가벗은 월력을 본 적이 있었네만

 

 

 어디에 둔들 잊기야 하겠느냐만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앉혀두고 도란도란 한살림 차려볼 요량이었네

 배고픈 유년, 주린 배를 조이며 풋살구 따먹던 서툰 힘으로도, 퉤퉤 침 뱉으며 산중 막사 박차고 내려온 무적의 힘으로도, 예컨데 벗겨도 벗겨도 도무지 속살을 열지 않아 전라의 자네를 눈앞에 두고도 수음하는 날이 길었네

 소출 없던 노역마저 다 끊긴 어느 날부터 그마저도 전전긍긍 마주 보는 일조차 주눅이 들곤 하였네

 

 미구에 닥칠 황혼

 먼지 나는 슬하의 시간

 젖비린내 가득한 만삭을 쓸어안고

 세월의 가파른 등에 업혀온 날

 외가닥 귀밑머리 훌훌 늙고 말캉 잇몸이 물렀네

 

 가물거리는 이 모든 역사의 체증과는 전혀 무관한 듯 사철 배경만 다를 뿐

 여전히 화덕 같은 눈빛의 자넨 선뜻 제 발로 걸어 나와 말 걸고 입 맞추곤 하였네

 

 같은 꽃 다시 폈다 지고

 같은 달 다시 차고 지고

 

 쥐락펴락 기를 써도 기백은 세워지지 않는데

 야속하신 자네 무정하신 자네

 평생을 벗겼어도 자네 속살을 본 적이 없었네

 어디 잠깐 눈물을 보였던가

 세밑, 새로 거느린 배경 안에서 일거에 이룬 환골탈태

 벗기려 할수록 단단하게 여미던 세월의 묵은 태를 다 벗었으니

 이젠 자네가 나를 벗길 차례라네

 활-활 태워 낼 차례라네

 

- 詩나무 동인집<인디언 기우제>

 

 


 

 

전형철 시인 / 카르만 라인

 

 

당신을 나비에 태웠다

종이비행기가 나는데,

비는 다시 오고 번개는 천천히

백지를 찢다 땅으로 숨어들었다

물의 씨앗을 받은 것들이

하늘로 방울로 풍선을 타고

지붕으로 해를 가리는 파지(把持)를 배우는 동안

첫 소절부터 아팠다, 당신을

비가 너무 많은 날에는 보지 못했다

차가워진 맥주잔을 쏘아 올리면

거품은 마르고

비는 또 오래 내리고

테두리가 없는 구름 너머 저 너머

홀로 비닐 랩 같은 대지를 두드리다 잠깐 잠깐

주먹을 쥐는

당신은 여기 없다

벌나비가 여기 없다

기억이 없어서, 시간이 늙어가서

비에 불을 붙여

발밑 구덩이 속에 던졌다

그만,

산과 물이 푸르러졌다

거기 당신이 없을 것 같아

새를 잡아 달에 걸어둔 채

 

*카르만 線: 지구 대기권과 우주의 경계선. 상공 106킬로미터 지점.

 

ㅡ『시인수첩』(2021, 겨울호)

 

 


 

 

전형철 시인 / 덫

 

 

오늘 묵혀둔 병이

당당히 생의 한켠을 결딴내다

비문을 파다 돌쩌귀가 떨어져 내리고

발바닥에 핏줄이 서고

 

딱 그만큼 내가 선 자리가

서서히 중심으로 깊어지는

딱 그만큼만

 

풀을 보며 생장점의 위치를 짚듯

천칭 저울의 정지를 점 찍어 두듯

 

명징한 공리(公理)있다면

그것은 내가 걸어온 발자국

 

불개미처럼 당신의 입가를 맴돌다

붉은 물집으로 남았거나

지렁이처럼 축축한 바짓단을 끌며

비내린 골목을 걸었거나

문장과 마음 사이를 사포질하던

모래폭풍이 썩은 이빨이었거나

 

- 시집 <고요가 아니다>에서

 

 


 

 

전형철 시인 / 투명 시인

 

 

 무서록이란 시를 썼다 상허를 알고 있었으나 두어 장 읽다 버려두었다 참회록은 읽었다 동주는 오래 두고 부러워한 처지라 그만치 쓰기 어렵지 않을까 저어했다 저어했다는 지훈의 시에서 처음 본 시어인데 내게는 흰 사슴의 선생도 푸른 사슴의 친구도 없었다

 

 아내는 현대소설을 전공했는데 나를 만나 소설을 쓰지 않는다 나와 사는 삶이 더 소설 같아 쓰는 죄를 짓지 않을 모양이다 문제는 친구인데 아내는 늘 당신은 주변에 사람이 너무 많아 관리를 잘해야 한다고 주억댄다 관리는 내가 당하는 것 같은데, 피부관리 받고 싶어라고 말을 돌리거나 주워 담지만

 

 주말이면 혼자 황학동 벼룩시장에서 청계천으로 스페인인가 서반아에 있다던 순례길처럼 걸으며 사람 인人의 왼쪽 획은 내 몸이오, 오른쪽은 내 그림자로구나 생각했다 주위에 벌써 칭병과 와병으로 술과 담배와 멀어진 사람이 적잖아 이제 나는 아주 가끔 술을 마시면 혼잣말이 많아

 

 

 취한 밤이면 4캔에 만 원 하는 기네스 1캔만 별 보고 한 모금 달 보고 한 모금 물을 먹는 폐계酒처럼 홀짝이다가 나머지 3캔은 벤치 위에 두고 오는데 아침 출근길 벤치에 남은 캔 3병은 어디 술의 나라로 갔는지 보이지 않고 투명한 하늘 아래 백석이 담고 싶었다던 갈매나무를 두고 나는 투명 시인을 생각하는 것이었다

 

-상상인』 2022-1월(3)호

 

 


 

 

전형철 시인 / 무서록無序錄

-해산계

 

 

우리는 늘 둥글게 앉았지

원탁의 기사는아니지만

한 순배 돌아가는 잔은 지구를항행하는 별자리였거나

가장 아름다운 소리로 발음되는

이국의 역을 향해 달리는 순환선이었지

가끔 선로의 끝이 다른 풍경 속으로빨려들 때

높이 뛰어올라 하이파이브

둥근 원 안에 마법사처럼매혹적으로 우리는

투명한 영혼이거나 무모한 소란이었거나

그냥 우리 같이 이를 부딪치며

다음 세기 간빙기를 기다리면 안 되나

침엽수처럼 여윈 두 번째 애이이나 걱정하면 안되나

하늘에 떠 있는 모든 것들이 시체가 되어 흩날릴 때

고딕풍風의 광장 네거리에서 '낭만적'이라고 합창하자

절망은 숭고하고

분노는 고슴도치처럼 함함하니

서로 다른 표정으로 맞이할

저녁의 소리들

슬프다

 

- 2013년 <현대시학> 10월호

 

 


 

전형철 시인

1977년 충북 옥천에서 출생. 고려대 국문학과  졸업 및  同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2007년 《현대시학》을 통해 등단.  2010년 서울문화재단 창작지원금 수혜. 지훈창작상 수상. 현재 계간 『다층』 편집위원. 서울여대, 서울교대, 안양대 국문과 강사. 시집 『고요가 아니다』 『이름 이후의 사람』. 현재 연성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