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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철 시인 / 화무십일홍
사는 동안 한 번도 꽃피우지 못한 채 죽어 간 목숨에 비한다면 다행스러워라 네 몸의 꽃이 되어 네 몸의 잎이 되어 한 몸이 되었으니 짧은 날 목숨 다한 내 사랑 그 찰나만을 탓하시라
제아무리 고운 꽃도 열흘 붉은 것이 없다 하나 그 한 잎 그 사소한 꽃잎 한 장, 하루를 살아도 함께 한 사연 깊어 꽃 지고 잎 져도 남은 날 함께 할 목마른 그리움을 안다면 지는 꽃, 그 비장함에 대하여 서둘러 말하지 마시라
-詩나무 동인집 <인디언 기우제>
전형철 시인 / 송정
바다에 섰다 지구가 조금씩 깨지고 있다 익숙한 것보다는 무서운 것이 길들이기에 편하다 떨어지는 별을 삼킨 눈에 순록의 순은 순함이 아니라 길들임이다 길들이는 중인 물의 혀와 스윙 댄스 추는 밤 바깥은 언제나 매혹적이어서 안쪽은 품거나 깊숙이 숨겨둔다 날아다니는 새를 잡아 공중에 박아두고 눈을 감는다 호수도 바다도 지구 위에서 보면 너른 거울이다 보석이 구르는 소리 격벽을 투명하게 만든다 한 발짝 나아가면 끝일 뭍의 벼랑에서, 물의 전초에서 쓸모없는 바람과 바다에 섰다 ㅡ계간 《시인시대》(2024, 봄호)
전형철 시인 / 보름달에 대한 소고遡考 - 발가벗은 월력을 본 적이 있었네만
어디에 둔들 잊기야 하겠느냐만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앉혀두고 도란도란 한살림 차려볼 요량이었네 배고픈 유년, 주린 배를 조이며 풋살구 따먹던 서툰 힘으로도, 퉤퉤 침 뱉으며 산중 막사 박차고 내려온 무적의 힘으로도, 예컨데 벗겨도 벗겨도 도무지 속살을 열지 않아 전라의 자네를 눈앞에 두고도 수음하는 날이 길었네 소출 없던 노역마저 다 끊긴 어느 날부터 그마저도 전전긍긍 마주 보는 일조차 주눅이 들곤 하였네
미구에 닥칠 황혼 먼지 나는 슬하의 시간 젖비린내 가득한 만삭을 쓸어안고 세월의 가파른 등에 업혀온 날 외가닥 귀밑머리 훌훌 늙고 말캉 잇몸이 물렀네
가물거리는 이 모든 역사의 체증과는 전혀 무관한 듯 사철 배경만 다를 뿐 여전히 화덕 같은 눈빛의 자넨 선뜻 제 발로 걸어 나와 말 걸고 입 맞추곤 하였네
같은 꽃 다시 폈다 지고 같은 달 다시 차고 지고
쥐락펴락 기를 써도 기백은 세워지지 않는데 야속하신 자네 무정하신 자네 평생을 벗겼어도 자네 속살을 본 적이 없었네 어디 잠깐 눈물을 보였던가 세밑, 새로 거느린 배경 안에서 일거에 이룬 환골탈태 벗기려 할수록 단단하게 여미던 세월의 묵은 태를 다 벗었으니 이젠 자네가 나를 벗길 차례라네 활-활 태워 낼 차례라네
- 詩나무 동인집<인디언 기우제>
전형철 시인 / 카르만 라인
당신을 나비에 태웠다 종이비행기가 나는데, 비는 다시 오고 번개는 천천히 백지를 찢다 땅으로 숨어들었다 물의 씨앗을 받은 것들이 하늘로 방울로 풍선을 타고 지붕으로 해를 가리는 파지(把持)를 배우는 동안 첫 소절부터 아팠다, 당신을 비가 너무 많은 날에는 보지 못했다 차가워진 맥주잔을 쏘아 올리면 거품은 마르고 비는 또 오래 내리고 테두리가 없는 구름 너머 저 너머 홀로 비닐 랩 같은 대지를 두드리다 잠깐 잠깐 주먹을 쥐는 당신은 여기 없다 벌나비가 여기 없다 기억이 없어서, 시간이 늙어가서 비에 불을 붙여 발밑 구덩이 속에 던졌다 그만, 산과 물이 푸르러졌다 거기 당신이 없을 것 같아 새를 잡아 달에 걸어둔 채
*카르만 線: 지구 대기권과 우주의 경계선. 상공 106킬로미터 지점.
ㅡ『시인수첩』(2021, 겨울호)
전형철 시인 / 덫
오늘 묵혀둔 병이 당당히 생의 한켠을 결딴내다 비문을 파다 돌쩌귀가 떨어져 내리고 발바닥에 핏줄이 서고
딱 그만큼 내가 선 자리가 서서히 중심으로 깊어지는 딱 그만큼만
풀을 보며 생장점의 위치를 짚듯 천칭 저울의 정지를 점 찍어 두듯
명징한 공리(公理)있다면 그것은 내가 걸어온 발자국
불개미처럼 당신의 입가를 맴돌다 붉은 물집으로 남았거나 지렁이처럼 축축한 바짓단을 끌며 비내린 골목을 걸었거나 문장과 마음 사이를 사포질하던 모래폭풍이 썩은 이빨이었거나
- 시집 <고요가 아니다>에서
전형철 시인 / 투명 시인
무서록이란 시를 썼다 상허를 알고 있었으나 두어 장 읽다 버려두었다 참회록은 읽었다 동주는 오래 두고 부러워한 처지라 그만치 쓰기 어렵지 않을까 저어했다 저어했다는 지훈의 시에서 처음 본 시어인데 내게는 흰 사슴의 선생도 푸른 사슴의 친구도 없었다
아내는 현대소설을 전공했는데 나를 만나 소설을 쓰지 않는다 나와 사는 삶이 더 소설 같아 쓰는 죄를 짓지 않을 모양이다 문제는 친구인데 아내는 늘 당신은 주변에 사람이 너무 많아 관리를 잘해야 한다고 주억댄다 관리는 내가 당하는 것 같은데, 피부관리 받고 싶어라고 말을 돌리거나 주워 담지만
주말이면 혼자 황학동 벼룩시장에서 청계천으로 스페인인가 서반아에 있다던 순례길처럼 걸으며 사람 인人의 왼쪽 획은 내 몸이오, 오른쪽은 내 그림자로구나 생각했다 주위에 벌써 칭병과 와병으로 술과 담배와 멀어진 사람이 적잖아 이제 나는 아주 가끔 술을 마시면 혼잣말이 많아
취한 밤이면 4캔에 만 원 하는 기네스 1캔만 별 보고 한 모금 달 보고 한 모금 물을 먹는 폐계酒처럼 홀짝이다가 나머지 3캔은 벤치 위에 두고 오는데 아침 출근길 벤치에 남은 캔 3병은 어디 술의 나라로 갔는지 보이지 않고 투명한 하늘 아래 백석이 담고 싶었다던 갈매나무를 두고 나는 투명 시인을 생각하는 것이었다
-상상인』 2022-1월(3)호
전형철 시인 / 무서록無序錄 -해산계
우리는 늘 둥글게 앉았지 원탁의 기사는아니지만 한 순배 돌아가는 잔은 지구를항행하는 별자리였거나 가장 아름다운 소리로 발음되는 이국의 역을 향해 달리는 순환선이었지 가끔 선로의 끝이 다른 풍경 속으로빨려들 때 높이 뛰어올라 하이파이브 둥근 원 안에 마법사처럼매혹적으로 우리는 투명한 영혼이거나 무모한 소란이었거나 그냥 우리 같이 이를 부딪치며 다음 세기 간빙기를 기다리면 안 되나 침엽수처럼 여윈 두 번째 애이이나 걱정하면 안되나 하늘에 떠 있는 모든 것들이 시체가 되어 흩날릴 때 고딕풍風의 광장 네거리에서 '낭만적'이라고 합창하자 절망은 숭고하고 분노는 고슴도치처럼 함함하니 서로 다른 표정으로 맞이할 저녁의 소리들 슬프다
- 2013년 <현대시학>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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