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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송진 시인 / 어제의 시 외 7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0. 28.
송진 시인 / 어제의 시

송진 시인 / 어제의 시

 

 

 어제는 흘러갔다고 하나 나는 오늘의 의자에 앉아 어제를 쓰고 있으니 아직 어제는 어제로 남아 있고 오늘은 왔으나 아직 어제의 침대에 누워 있으니 내일은 오늘의 침대에 누워 내일을 기다리고 있어라 내일은 어제의 손톱을 기웃거리고 오늘은 어제의 손톱을 기웃거리니 내일은 다시 내 일을 불러오고 오가는 사람 정신없고 황망하여라 발밑에 어제의 거미가 죽어 있고 고목의 구멍마다 검은 박쥐우산이 박혀 있고 저건 저격이다 저건 고의다 저건 저녁나무의 숨구멍을 틀어막는 일 저건 새벽 고목에 고인 빗물을 먹으러 온 새들이 발길을 되돌리는 일 공중에서 날개를 한없이 퍼덕거리고··· 그리고 또 무엇이 있는가 사람의 일이여 이미 새들에게 세 들어 사는 사람의 일이여 이미 그런 것을 저 검은 박쥐우산의 운명이 꼭 저것만은 아닌 것을 검은 밤 휴대폰 발광을 들여다보며 지나가던 한 남자아이가 구름 옷자락 흘깃 쳐다보고 다시 발광을 따라간다

 

-시집 『방금 육체를 마친 얼굴처럼』에서

 

 


 

 

송진 시인 / 물가에 앉아

 

 

아름다운 소녀가 물가에 살고 있었어요

종이로 만든 금빛 종을 손에 들고 있었어요

 

물에 젖으면 더 맑은 목소리로 노래하는 신비로운 금빛 종이었어요

 

사람들은 물가에 모여들고 또 모여들었어요

신비로운 금빛 종의 노랫소리를 듣고 싶어 했어요

 

금빛 종은 온몸이 다 젖어 더 이상 젖을 곳이 없을 때까지 노래했어요

 

저녁이 되어도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어요

새벽이 되어도 사람들은 우물가로 돌아가지 않았어요

 

꽃들이 피고 지고

목장의 소들이 목이 말라 쓰러졌어요

 

닭들은 닭장을 뛰쳐나갔고 돼지들은 우리 안에서 우왕좌왕했어요

 

굴뚝은 차갑게 식었고 아기들은 굶어 죽어 갔어요

 

젖은 금빛 종을 들고 있던 아름다운 소녀는 형체도 없이 사라졌어요

 

물가에 개구리 알들이 쌓여갔어요

물가를 지나가던 당나귀가 뒤돌아보았어요

 

순한 바람이 불고

 

버드나무 잎 하나가 물 위로 떨어졌어요

 

아름다운 바이올린 소리가 큰유리새처럼 울려 퍼졌어요

 

아름다운 새벽의 물가에 앉아있는 듯

마음의 정화가 끝난 듯

오른쪽 손등이 윗입술과 인중 위에 부드럽게 닿아있어요

 

-시집 『럭키와 베토벤이 사라진 권총의 바닷가』에서

 

 


 

 

송진 시인 / 내 몸 안에는 저탄소 사과가 자란다

 

 

 내 몸 안에는 거칠어지려는 나와 부드러워지려는 나가 있다 거칠산역 새벽에 가면 거칠어진 나가 도착해있다 왼손에는 길든 가죽가방을 들고 오른손은 저탄소 사과를 먹고 있다 새벽의 바다는 안개 속에 휘감겨있고 거칠산역 기차는 수평선을 거침없이 달린다 거칠어진 나의 손바닥에는 저탄소 사과의 앙상한 뼈다귀가 놓여있다 움켜쥐어도 한 방울의 즙조차 나오지 않는 말라비틀어진 저탄소 사과의 젖꼭지를 바다를 향해 던진다 투수가 된 거칠산역은 부드러운 나를 맞이할 준비가 되어있다 그런가 진정 그런가 그렇다 그렇다고 하자 부드러운 나가 두릅역에 내린다 연보랏빛 치렁치렁한 길고 긴 머리카락 위로 해수면이 높아진 봄을 이고 왔다 한 달 내내 내린 함박눈으로 사방은 백야처럼 잠들지 못하고 부드러운 나는 6.25mm 높아진 해수면으로 찰랑찰랑 봄옷을 지어 입은 해실해실 웃는 듯 우는 3도 화상 입은 뜨거운 봄을 데리고 왔다 지금은 실제 기후 상황이다 수척해진 북극곰이 빙하에 불어터진 외마디 비명을 질러댔다

 

-시집 『럭키와 베토벤이 사라진 권총의 바닷가』에서

 

 


 

 

송진 시인 / 참회록 61

 

 

 영희는 저 굽은 어깨로 뭘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아직 어깨가 반듯하다고 말할 수 없는 나는 영희를 알고 영희는 영희를 모른다 영화스러운 날도 없이 저문 영희의 시간은 아니지 영희만이 알고 있는 영화의 화관을 드러내놓고 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영희는 맨발로 기어가고 있다 영희는 맨살로 울고 있다 맨살의 다리를 벌리고 샤콘느를 들으며 오징어톡을 먹으며 더 이상 효과 없는 허브를 발바닥에 혓바닥에 바르며 영희는 나를 보지만 나를 보지 않고 있다 나는 영희를 보지만 영희의 보지를 보고 의사에게 나를 보고하고 있다

 

-계간 『다시올문학』 2022년 여름호 발표

 

 


 

 

송진 시인 / 빙하의 장례식*

 

 

 큰 목소리를 내지 않기로 했어 작은 목소리만으로 충분히 아름다우니까 앞 유리창은 시시각각 몸을 바꾸고 있어 죽은 개로 달리는 시체로 피투성이 소녀로 어쩔건데 대놓고 깔아뭉개고 있어 잠시 미쳤나봐 큰소리를 내야지 그래도 알려질듯 말듯한 만행들 보일듯 말듯한 성폭력들 뭘하고 있는거니 목소리들아 목소리를 내자 목소리를 내자 영기차 영차 염라대왕 염치도 없어 숲풀에 숨네 어찌 이대로 잘 살았을까 명줄도 길어 산게 산게 아닌데 다들 잘 살았다고 하네 수국잎은 까맣게 시들고 빨간 우체통은 9월에 우뚝 서 버렸네 운명이 되어 버렸네 주황빛 얇은 점퍼 입은 보름달 시퍼런 한쪽 다리 절며 음력 팔월 한가위 이틀 지난 참되고 참된 거리 거짓 없는 명백한 거리 걸어간다네 하하하 하하하 하하하 하하하 태풍에 귀 잘려나간 눈먼 나뭇가지 더 가난해지는 연습 중이란다 푯말 내걸고 자꾸 웃네 자꾸 더더더더더 웃네

 

* 알프스의 피졸 빙하가 사라지게 된 것을 추모하는 상징적인 의식

 

-웹진 『공정한시인의사회』 2022년 10월호 발표

 

 


 

 

송진 시인 / 나, 잘 돌보기 16

ㅡ후쿠오카의 물오리

 

 

그는 운동화 끈을 매어주다 말고

발목에 키스를 했어요

 

물잠자리 한 마리 급히 지나갔지요

 

그는 복숭아뼈를 보며

 

발 좀 씻어

 

그랬지요

 

혀로 핥고

 

입술로 빨고

 

피가 하얗게 되었어요

 

오리들이 저녁 물 위에 도시락을 펴며 밥 먹자 그랬지요

 

밥의 얼굴에 하얀 눈썹이 성글었네요

 

크리스마스 때는 산타 잔에 뜨거운 밀크티를 마시기로 해요

 

-계간 『한국미소문학』 2023년 여름호 발표

 

 


 

 

송진 시인 / 호흡

 

 

 어떻게 하든 호흡하는 방법을 찾아야했다 익숙해져야 했다 이 작은 세상에서 큰 호흡을 해야하니까 호흡은 까마귀와 까치의 틈이다 명자꽃과 흰동백의 임플란트다 보세 윈도우에 걸려있는 죽은 여인의 얼굴이다 걸어다닐 때마다 귀신들이 서 있다 나를 보고 있다 나도 그들을 본다 피부가 찌릿찌릿해진다 근육이 수축된다 소름이 끼친다 식은땀이 난다 그때는 얼른 그곳을 벗어나야 한다 맑은 강가에 앉아 호흡을 한다 역시 맑은 바람이 최고다

 

-시집 <플로깅> 중에서

 

 


 

 

송진 시인 / 수국과 치자꽃

 

 

 두 개의 거울이지 커다란 얼굴과 작은 얼굴이 골목의 끝집마다 송아지와 낙타의 혹처럼 서 있지 미래의 조달청이라고 우리는 운을 떼며 조청을 그리워한 것처럼 바다에 들러붙었지 그렇다 치자 밑줄 그은 심장이 바다에 풍덩! 헤어지지 못할 거라는 예감은 쿠키의 맛처럼 제각각이어서 젖은 하늘빛 린넨 셔츠가 마르기 전에 서둘러 육체를 마쳤다 치자의 끝말은 치자리 수국의 끝말은 수구리 짙어진 하늘과 옅어진 등대 사이에서 면과 읍과 리를 그리워한 거지 사라진 희뿌연 낮달은 시계 반대 방향으로 보랏빛 비를 뿌렸지 다가오는 달빛은 인간의 뜨거운 손끝에 누런 화상의 자국마저 길가에 버려진 치자꽃의 리, 그렇다 치자 아니라고 치자 수국은 태양처럼 크고 둥글었지 방금 육체를 마친 얼굴처럼

 

-시집 <방금 육체를 마친 얼굴처럼> 중에서

 

 


 

송진 시인

1962년 부산에서 출생. 1999년 《다층》 제1회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지옥에 다녀오다』 『나만 몰랐나봐』 『시체 분류법』 『미장센』 『복숭앗빛 복숭아』 『방금 육체를 마친 얼굴처럼』 『플로깅』. 문예지 <엄브렐라> 발행인 겸 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