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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동 시인 / 병에 대한 오해
상가(喪家) 한구석 속이 훤히 보이는 냉장고가 떨고 있다 독기 품은 시퍼런 술병들 오와 열을 갖춘 채 보무도 당당하다 한무리 문상객들이 들이닥치자 맨 앞줄에 선 병들 쨍그랑쨍그랑 나팔 불며 진군한다 전장엔 어느새 연기가 자욱하다 적들은 저마다 투명한 칼을 움켜쥐고 말들을 쏟아낸다 지난 전투의 무용담을 신나게 늘어놓는 놈도 있다 여기저기 창검 부딪치는 소리가 울려퍼진다 첨병들이 목구멍을 타고 적진 깊숙한 곳까지 침투하자 적들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알아들을 수도 없는 소리를 지르며 거세게 반항한다 개중에 힘 빠진 놈은 엉덩이를 쳐들고 줄행랑 치고 새로 투입된 지원병들이 그 자리에 앉는다 독기를 품고 진군에 진군을 거듭하는 푸른 병사들, 밤새 일진일퇴 격전을 벌인다
망자 또한 언제부턴가 병들의 습격을 받았다 그들의 공격은 결코 하루도 멈추는 날이 없었다 시시때때 밀려드는 병들의 계략에 두 손 들 수밖에 없었다 비우면 비울수록 수심도 깊어지는 병 밤새도록 푸른 병들은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투명한 벙커를 지키고 있다
이중동 시인 / 창밖의 모나리자
광희문 사거리 카페에 앉아 아메리카노를 마신다 창 너머 버스 정거장은 사람들을 내리고 싣는다 버스는 떠나고 그 자리에 모나리자가 서 있다
스크린도어에 기대어 여백처럼 웃는 모나리자 강을 건너온 물새처럼 푸드덕 물방울이 튄다 버스에서 내린 사람들은 저마다 짐을 지고 도시를 가로질러 어디론가 떠난다
모나리자는 손을 뻗어 푸른 하늘에다 눈썹달을 그린다 달 속에서 창백한 모나리자가 방아를 찧는다 빻아진 커피콩들이 절구통에서 푸드덕거린다 모나리자가 커피콩을 한 움큼 쥐고 허공에 흩뿌리자 거리는 순식간에 사막이 된다
버스 정거장을 내려다보며 사마르칸트로 가는 꿈을 꾼다 아메리카노 쓴맛 같은 시절을 건너온 모나리자 나는 그녀의 손을 잡고 사막을 건너 레기스탄광장*에 앉는다
그녀는 내 어깨에 기대 청옥 같은 시절들을 이야기한다 붉은 모스크 뒤로 뜨거웠던 태양은 지고 사막여우가 운다 눈썹달 같은 그녀의 창백한 얼굴을 나는 오래도록 생각한다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에 있는 광장 -월간 『우리시』 2022년 2월호 발표
이중동 시인 / 화문(花紋)
한바탕 가을비가 지나간 날 철제대문 페인트 틈으로 비치는 녹물을 본다 빗물이 바람의 씨를 받아 꽃을 피운 것일까 늦가을 마른 꽃 같은 무늬가 생겼다 대문 사이사이 꽃들이 바람에 서걱거리고 있다
저문 들길을 걷다가 마른 쑥부쟁이 꽃을 본 적 있다 향기 피워낸 자리마다 쪼그라든 생을 붙잡고 있었다 잎과 잎이 빛과 바람을 들이고 낼 적마다 영겁(永)의 각질이 한 겹 한 겹 쌓여가고 있었다 빛과 바람은 쑥부쟁이 꽃을 쪼그라들게 한 욕망이다
팔순 아버지의 얼굴에도 마른 꽃이 피어 있다 하늘의 별들이 명멸하고 수심(心)이 비바람처럼 가슴 속을 들락거리는 동안 거뭇거뭇 마른 꽃이 피어났다
대문에 번지는 저 녹물은 수심의 그늘 저물녘 새 한 마리가 마른 꽃을 쪼고 있다 저 새 또한 우주의 문밖을 통과한 시간이 피운 꽃의 잔상인지도 모른다
이중동 시인 / 붕어화석에 관한 고찰
붕어가 관 뚜껑을 열고 헤엄쳐 나온다 노란 붕어가 지느러미를 흔들며 거리를 유영한다 지느러미가 흔들리자 거리는 한순간 물길이 된다 물길이 거세지자 가로수가 뿌리째 뽑힌 채 연못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거처를 잃은 새들도 날개를 접고 연못으로 뛰어든다 지느러미가 돋은 새들이 물속을 헤엄친다 거리에 늘어선 가게들이 종종걸음을 친다 진열대 안 마네킹들이 다리를 꼬고 앉아 화장을 한다 해장국집 창문들이 뼈다귀를 쏟으며 덜컹거린다 국숫집 처마들이 면발을 늘리며 거리를 측량한다 평수를 늘려가던 부동산119가 계단을 급히 오르내린다 부활한 예수를 매단 교회들이 하늘에서 춤을 춘다. 돋보기를 고쳐 쓴 안경점이 길을 읽는다 골절된 거리를 판독한 정형외과가 목발을 짚고 절뚝거린다 증권거래소가 지폐로 배를 만들어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다 길을 잃은 자동차는 전속력으로 연못 속을 달린다 순찰차도 연못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수초를 입은 사람들이 컴컴한 연못 속을 헤엄친다. 집들이 연못 위에 둥둥 떠다닌다 행인을 잃은 가로등이 물가에서 저녁을 밝힌다 연못 속에서 저녁연기가 피어오른다 빵틀에서 나온 붕어들이 허기의 물바다를 누비며 어둠속을 달음질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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