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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인 시인 / 가볍게 노래하다
살아서 새가 된 한 여자가 있다 새의 말을 하고 새처럼 먹는다 툭하면 부리를 세워 나의 가슴을 콕콕 쪼기도 한다 나는 사람의 혀로 그녀를 찌르고, 그런 날이면 내 가슴엔 능소화가 낭자하다 어쩌면 태생이 새였을지도 모를 여자 45킬로 몸무게를 다 덜어내는 일이 생의 무늬 전부였다고 이제 손등의 살만 벗어 주면 된다고 숨소리까지 퍼주던 여자 사람의 언어로 부딪히던 그 어느 때가 생각난다 미처 덜어내지 못한 나의 무게로 아직도 날지 못하고 있는 여자, 어머니
이제인 시인 / 단풍 편지
불현듯 다녀가라는 편지 받고 씁니다 포기할 수도 쉽게 다가갈 수도 없는 먼 허공의 거리 그 아득함을 글자로나마 채우겠다는 것인지 쓰고 또 지우고 씁니다 하늘허리를 두르고도 남을 빈 말들의 행렬 다시 한 자 한 자 지워 나갑니다 마지막 남은 한 문장 화석이 된 붉은 시간의 잎들 그대 가슴에도 그 불멸이 자라고 있겠지
오늘밤은 꼭 그대 거기 붉게 물든 한 그루 단풍나무로 서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제인 시인 / 들꽃속에서 잠들다
땅이 한꺼번에 불을 켜 든 것 같습니다 초파일 연등 천 개쯤은 달았을까요 아니, 땅에 별이 돋아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동안 땅에서 별을 볼 수 없었던 건 우리가 너무 하늘만 보아서였던 건 아닐까요 어쩌면 하늘보다 땅은 더 많은 별을 품고 있었는 지도 모릅니다 아주 작아서 눈, 코, 입 분간할 수 없는 들꽃 풀줄기 스쳐가는 바람 한 점 위에까지 별은 돋아나고 있습니다 물 한 컵 속 시원히 마셔본 적 없는 사막의 입술에다 꽃을 피우고 있는 생명의 소리가 들립니다 그 속에서 수만 개의 별들이 서로 방울방울 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말라가던 가슴이 흥건히 젖어옵니다 까닭 없이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우리들 몸 속에서도 지금, 제각각 품고 살아왔던 별들이 돋아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이제인 시인 / 떡 값
떡 값 검사라니? 검사가 떡값밖에 안 된다는 말인가?
주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다함께 개떡이 되는 밥 떡 값
이제인 시인 / 비행기 안에서 흰 구름을 보다
사람을 찾습니다 전전생에 그 전생에 태생이 흰 토끼였을지도 모를, 탯줄보다 질긴 인연 업보처럼 끌어안고 아득한 우주의 숲속 어디쯤 흰눈의 강을 지나 하얀 망사 옷 돛폭처럼 펄럭이며 동해 어느 바닷가를 헤매고 있을, 한 만년 후에나 허락될 만남을 위해 만남보다 더 많은 세월을 떠도는 사람 수십 번 고쳐 태어나도 다시 그리울 당신, 당신은 누구신가요 (*)
-시집 『내 생의 무게를 달다』(시학사 간행)
이제인 시인 / 지상의 숟가락 하나 -밥 시편37/ 밥심을 위하여
1 저렇게도 슬플 수가 있을까 세상에 밥 먹는 모습 아무것도 아닐 수 있는 밥 한 숟가락 목구멍에 떠 넣는 일이 때로는 사람의 모든 것이 될 수도 있어서 한 끼 밥이 성전이고 종교가 될 수 있어서
2 밥심보다 더 믿을 만한 힘은 없어 숟가락 들 수 있는 힘만 남아 있어도 거시기를 생각한다는, 남자의 힘도 결국 밥심에서 비롯된 것일지니
3 애지중지 큰아들, 막내딸, 살던 집 심지어 화장실 가는 것까지 세상 모든 것 다 잊어도 이것만은 잊지 못한다고 치매의 노모는 마지막 남은 힘을 다 바쳐서 숟가락을 들고 있다
이제인 시인 / 오늘 인사동에서 내 삶의 주인을 만나다 -밥 시편52/ 허기밥
고질병 같은 너를 잘 가라 보내 놓고 왕벚나무 꽃잎 날리는 인사동 음식점 창가에 홀로 앉아 꾸역꾸역 밥알을 밀어 넣는다
너도 버리고 나도 버리고 세상 것 다 버려도 끝끝내 못 버릴 것은 하루 세끼 밥그릇인가
누더기처럼 눌어붙어 이 저녁 나에게 기어코 밥을 떠먹이는 모진 허기 이제야 나는 알겠다 누가 내 생의 주인인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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