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이제인 시인 / 가볍게 노래하다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1. 8.
이제인 시인 / 가볍게 노래하다

이제인 시인 / 가볍게 노래하다

 

 

살아서 새가 된 한 여자가 있다

새의 말을 하고 새처럼 먹는다

툭하면 부리를 세워 나의 가슴을

콕콕 쪼기도 한다

나는 사람의 혀로 그녀를 찌르고,

그런 날이면 내 가슴엔 능소화가 낭자하다

어쩌면 태생이 새였을지도 모를 여자

45킬로 몸무게를 다 덜어내는 일이

생의 무늬 전부였다고

이제 손등의 살만 벗어 주면 된다고

숨소리까지 퍼주던 여자

사람의 언어로 부딪히던 그 어느 때가

생각난다

미처 덜어내지 못한 나의 무게로

아직도 날지 못하고 있는 여자, 어머니

 

 


 

 

 이제인 시인 / 단풍 편지

 

 

불현듯 다녀가라는

편지 받고 씁니다

포기할 수도

쉽게 다가갈 수도 없는

먼 허공의 거리

그 아득함을 글자로나마

채우겠다는 것인지

쓰고 또 지우고 씁니다

하늘허리를 두르고도

남을 빈 말들의 행렬

다시 한 자 한 자 지워 나갑니다

마지막 남은 한 문장

화석이 된 붉은 시간의 잎들

그대 가슴에도

그 불멸이 자라고 있겠지

 

오늘밤은

꼭 그대 거기

붉게 물든 한 그루 단풍나무로

서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제인 시인 / 들꽃속에서 잠들다

 

 

땅이 한꺼번에 불을 켜 든 것 같습니다

초파일 연등 천 개쯤은 달았을까요

아니, 땅에 별이 돋아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동안 땅에서 별을 볼 수 없었던 건

우리가 너무 하늘만 보아서였던 건 아닐까요

어쩌면 하늘보다 땅은 더 많은 별을

품고 있었는 지도 모릅니다

아주 작아서 눈, 코, 입 분간할 수 없는 들꽃

풀줄기 스쳐가는 바람 한 점 위에까지

별은 돋아나고 있습니다

물 한 컵 속 시원히 마셔본 적 없는 사막의 입술에다

꽃을 피우고 있는 생명의 소리가 들립니다

그 속에서 수만 개의 별들이 서로 방울방울

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말라가던 가슴이 흥건히 젖어옵니다

까닭 없이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우리들 몸 속에서도 지금, 제각각 품고 살아왔던

별들이 돋아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이제인 시인 / 떡 값

 

 

떡 값 검사라니?

검사가 떡값밖에 안 된다는 말인가?

 

주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다함께

개떡이 되는 밥

떡 값

 

 


 

 

이제인 시인 / 비행기 안에서 흰 구름을 보다

 

 

사람을 찾습니다

전전생에 그 전생에

태생이 흰 토끼였을지도 모를,

탯줄보다 질긴 인연

업보처럼 끌어안고

아득한 우주의 숲속 어디쯤

흰눈의 강을 지나

하얀 망사 옷 돛폭처럼 펄럭이며

동해 어느 바닷가를 헤매고 있을,

한 만년 후에나 허락될 만남을 위해

만남보다 더 많은 세월을 떠도는 사람

수십 번 고쳐 태어나도 다시 그리울

당신, 당신은 누구신가요 (*)

 

-시집 『내 생의 무게를 달다』(시학사 간행)

 

 


 

 

이제인 시인 / 지상의 숟가락 하나

-밥 시편37/ 밥심을 위하여

 

 

1

저렇게도 슬플 수가 있을까

세상에 밥 먹는 모습

아무것도 아닐 수 있는

밥 한 숟가락 목구멍에 떠 넣는 일이

때로는 사람의 모든 것이 될 수도 있어서

한 끼 밥이 성전이고

종교가 될 수 있어서

 

2

밥심보다 더 믿을 만한 힘은 없어

숟가락 들 수 있는 힘만 남아 있어도

거시기를 생각한다는,

남자의 힘도

결국 밥심에서 비롯된 것일지니

 

3

애지중지 큰아들, 막내딸, 살던 집

심지어 화장실 가는 것까지

세상 모든 것 다 잊어도

이것만은 잊지 못한다고

치매의 노모는 마지막 남은 힘을 다 바쳐서

숟가락을 들고 있다

 

 


 

 

이제인 시인 / 오늘 인사동에서 내 삶의 주인을 만나다

-밥 시편52/ 허기밥

 

 

고질병 같은 너를

잘 가라 보내 놓고

왕벚나무 꽃잎 날리는

인사동 음식점 창가에 홀로 앉아

꾸역꾸역 밥알을 밀어 넣는다

 

너도 버리고 나도 버리고

세상 것 다 버려도

끝끝내 못 버릴 것은

하루 세끼 밥그릇인가

 

누더기처럼 눌어붙어

이 저녁

나에게 기어코 밥을 떠먹이는

모진 허기

이제야 나는 알겠다

누가 내 생의 주인인가를

 

 


 

이제인 시인

경남 하동에서 출생. 성신여자대학교 및 동 대학원 졸업. 2003년 《시와 시학》으로 등단. 시집 『내 생의 무게를 달다』 『오늘 내 밥그릇은 무사할까』가 있음. 재미시인협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