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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용 시인 / 주남저수지
얼마나 가두어야 저 방렬한 연꽃처럼 필 수 있을까 못 중간 나뭇가지 위에 앉아 있는 백로처럼 얼마나 고단해야 나무와 한 몸 되어 흰 꽃으로 걸릴 수 있을까 껴안으면 안을수록 더욱 아프게 돋아나는 가시연
나는 얼마나 떠돌아야 저 부레옥잠처럼 정화될 수 있을까
박주용 시인 / 데칼코마니
경계란 참으로 가깝고도 먼 그리움인가 소금쟁이가 연못 위를 미끄러지며 생의 균형을 잡으며 간다 경계에 푸른 발을 디디고 서 있는 수양버들도 수면에 닿을 듯 말 듯 삶의 촉수 내민다 물 위에 떠 있는 연잎에 나도 손바닥 대어본다 노랗게 불을 켠 손금 같은 잎맥들이 표면장력으로 달려 나오고 덩달아 셀 수 없는 물이랑이 자맥질하며 내 나이 자꾸 건져 올린다.
그리움은 접어도 그리움인가 허리 숙여 연못 속을 들여다본다 목덜미 물렸는지 하늘은 온통 노을빛이다 하늘은 흐르고 꽃그늘이 머문 구름 속엔 우물거림으로도 잘 씹히지 않는 살아온 신발 자국이 숨바꼭질처럼 웅크리고 숨어 있다 어둠과 빛살 가득 담긴 신발을 펴 운동장에 활짝 펼쳐보면 내 나이는 신기하게 거꾸로 걷고 있고 몰린 피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나는 가끔 철봉에 발 얹기도 한다
하늘에 뿌리를 둔 탯줄이 연잎을 둥글게 경계로 밀어 올리는 지금 소금쟁이보다 짠하게 물 위를 걷고 있는 간간한 내 나이가 반으로 접히고 있다. -시집 『점자, 그녀가 환하다』 2016. 시산맥사
박주용 시인 / 아내를 못 말리는 여자라고 하는 까닭은
시골길 가다 문득 차 세워 놓고 가느다란 목 코스모스에 기대고는 가을 적시기 때문이다 묻혀갈 한 평 남짓 땅, 저 구름 위에 자리 깔아놓고 시시각각으로 변해가는 양 떼며, 꽃이며, 새털 보며 하늘 적시기 때문이다, 맑은 개울 은빛 피라미보다도 속살거리는 미루나무 이파리 배꼽 뒤집히는 이야기에도 웃음 적시기 때문이다 아내를 못 말리는 여자라고 하는 까닭은 아파트 뒤편 산비탈, 예닐곱 평 남짓 뿌려놓은 쑥갓, 시금치, 상추, 열무 이름대로 고개 드는 모습에도 텃밭 적시기 때문이다, 비 내리는 날 아이들 자고 있는 도회지의 밤 일으켜 홍등 켜져 있는 동네 생맥주집에 앉아 궁둥이보다도 더 질펀하게 술잔 적시기 때문이다, 달빛 드는 베란다 무릎 사이로 민달팽이 한 마리 지나면 난초 촉 같은 곰삭은 첫사랑에 시동 걸다가도 이내 싱크대로 돌아와 손등 적시기 때문이다
-시집 『점자, 그녀가 환하다』(시산맥사, 2016)
박주용 시인 / 모서리
마주하고 있어도 언제나 낯설지 네 낯이 없다면 내 낯 허물어진다는 것 알면서도 등지며 살지, 경계 만들며 살지 거울처럼 차가운 감정 맞대어 밀어 올릴 때마다 변방의 꼭짓점엔 자신을 내던지며 쑤셔박혔던 저 새들의 절망으로 푸른 멍울 자라기도 하지 외나무다리에서는 모눈종이처럼 마주 서는 시간과 떠나가는 거리 일정하지 속도 삐끗하면 서로에게 칼날 겨누지 칼끝에서는 꽃망울 맺히기도 하지 우리들의 임계점엔 모반의 꽃 피어나기도 하지 그래도, 둥근 장미 한 송이쯤은 품고 살지 너와 나는 태생부터 신이 아니지 모가 나 있으나 모가 나 있지 않지 마주하고 있어도 언제나 그립지.
박주용 시인 / 물푸레나무가 있는 풍경
내가 바라보는 풍경은 연두가 없어 보라도 없다 소실점 밖 나무들은 잎 하나 품지 못하고 염기 없는 생각들로 무채색 도배를 하고 있다 한때 나는 세상의 소실점에 태깔 나게 서고 싶었다 하지만 산발치에도 뿌리내리지 못하고 빛바랜 그림처럼 야위어 갔다 싱겁게 흐르는 구름에도 셀 수 없이 넘어졌고 움 하나 틔우지 못하는 얇은 귀도 바람 소리에 중이염을 앓았다 물관은 점점 말라 생각 하나 퍼 올리지 못하고 쩍쩍 금이 갔다 빛깔 없는 무채색의 세상에서 나는 더 이상 내가 아니었다 이제는 터치 한 번으로도 색 도드라지는 그림 그리는 여자 만나고 싶다 서 있는 배경에서 짙고 옅음 말하지 않아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내가 물드는 여자 만나고 싶다 손끝에 화려한 독 묻어있는 치명적인 여자라면 더욱 좋겠다 붓놀림 하나로도 열병 같은 꽃 피워낼 수 있다면 알몸으로 뭉개져도 좋겠다 원근법으로 다가오는 여자, 그녀의 농도 사랑하겠다 입술과 입술 포개지는 저 색들의 보색점에서 잎 하나 피워낼 수 있다면 눈썹과 눈썹 만나지는 저 색들의 소실점에서 열매하나 달아낼 수 있다면 색 우려내는 물푸레나무와 한세상 맛깔나게 살겠다 내가 바라보는 풍경은 주황이 있어 파랑도 있었으면 좋겠다 -시집 『점자, 그녀가 환하다』 2016. 시산맥사
박주용 시인 / 소금쟁이
아버지가 물 위 걷는다 물수제비뜨며 사뿐 강 건넌다 가벼운 몸무게와 젖지 않는 몸 얼마를 비워야 저렇게 가벼워질 수 있나 얼마를 젖어야 저렇게 젖지 않을 수 있나 정강이를 물 위에 내리고 수면에 온몸 맡기며 가고 있다
얼마나 간간한 표면장력이기에 저렇게 가뿐히 생을 건널 수 있는 걸까
-시집 『점자, 그녀가 환하다』에서
박주용 시인 / 쌀밥, 그 힘으로 살아왔다
호박잎 죽보다 옥수수 꽁보리밥보다 꺼끌꺼끌한 생 내 몸뚱이 작살나는 줄 모르고 하루하루 숨차게 살아왔어 벼 수매 가마니 푸른 도장 찍어 놓은 듯 파랗게 엎드려 숨죽여 있으라는 말씀은 나 두 번 죽이는 일인 거여 세상 일이 새참 먹듯 간간히 건너뛸 수 있는 거라면 몰라도, 그렇지 않다면 목숨 같은 쌀 가지고 농하지는 말어 우리 아버지의 아버지 그리고 아버지의 아버지가 오줌줄기처럼 노랗게 이어온 목숨이여 농사짓는다고 생각 없이 살아온 거 아녀 땅 소중한 줄 내 다 알고, 쌀 소중한 줄 내 다 알어 조상님들 뜻 따라 봄이면 자식 같은 종자 볍씨 내어 소금물에 숨 참아내고, 잿물에도 눈 발갛게 뜨는 튼실한 놈만 골라 생의 못자리에 발목 심으며 살아왔어 그 놈들 커가며 어디 재미만 있었겠어 푹푹 빠지는 물 수렁논 발목 관절염으로 쟁기질하고 속상한 갈비뼈 몇 개 꺼내 써레질도 하며 그렇게 삶 다독거리며 농투성이 이름 헛되지 않게 꾸역꾸역 살아온 거여 아. 그런데 이 짓 그만두라니 이 짓 하지 않더라도 보상은 해 준다니 자식 잃고 그 코딱지만 한 돈 몇 푼으로 해결이 되는 그런 경우는 아닌 거여 내 한평생 배운 게 이 짓여 더욱이 지금까지 수렁논에 뼈 빠진 게 얼만데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아버지 그리고 아버지의 아버지 뼈까지 합치면 헤아릴 수 없는 뼈가 이 논에 퍼렇게 숨 쉬고 있는데 여름이면 뻐꾹새 울음처럼 볏대가 쑥쑥 자라고 가을이면 자식 불알처럼 축축 늘어진 씨알이 흐뭇하게 한 논 가득한데 임자 없는 무덤처럼 덥수룩 묵정논 만들라 하면 그게 될성부른 소리여 어림없어. 생각 없이 그런 말은 말어 요새 신문 널찍하게 차지하고 있는 윤기 잘잘 흐르는 캘리포니아 평원이나 인더스강 유역과는 비교도 안 되는 텃논 몇 마지기 가지고 땅땅거리고 싶어 어깃장 놓는 거 절대 아닌 거여 조상님네들이 그리 한 것처럼 그냥 내 땅에서 내 손으로 생 가꾸고 싶은 거여 무슨 욕심 있어서가 아닌 거여 쌀밥 한 사발 고봉으로 얹어 먹고 내 땅에 발 디디고 있으면 등뼈가 슬금슬금 일어서고 소싯적 배운 신석기 시대 그 힘센 황소처럼 손아귀에 불끈불끈 힘이 솟아올라 그런 거여 너무 옥죄지는 마. 꽃차례도 마디 돋을 만큼 여유로워야 목 내밀고 꽃 피우는 법인 거여 우루구아인지, 우라질인지 나 몰러 쌀시장 개방인지, 견방인지 나 그런 거 잘 몰러 들꽃묶음처럼 볏단 하나 세워두면 그냥 자식새끼 세워둔 것처럼 뿌듯해서 그런 거여 다른 뜻 없어, 정말 다른 뜻은 없어 쌀밥, 그 힘으로 나 지금까지 살아온 것처럼 앞으로도 그렇게 살고 싶어 그런 거여 정말, 그런 거여
-시집 『점자, 그녀가 환하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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