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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주용 시인 / 주남저수지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1. 8.
박주용 시인 / 주남저수지

박주용 시인 / 주남저수지

 

 

얼마나 가두어야

저 방렬한 연꽃처럼 필 수 있을까

못 중간

나뭇가지 위에 앉아 있는 백로처럼

얼마나 고단해야

나무와 한 몸 되어

흰 꽃으로 걸릴 수 있을까

껴안으면 안을수록

더욱 아프게 돋아나는 가시연

 

나는 얼마나 떠돌아야

저 부레옥잠처럼 정화될 수 있을까

 

 


 

 

박주용 시인 / 데칼코마니

 

경계란 참으로 가깝고도 먼 그리움인가

소금쟁이가 연못 위를 미끄러지며

생의 균형을 잡으며 간다

경계에 푸른 발을 디디고 서 있는 수양버들도

수면에 닿을 듯 말 듯 삶의 촉수 내민다

물 위에 떠 있는 연잎에 나도 손바닥 대어본다

노랗게 불을 켠 손금 같은 잎맥들이 표면장력으로 달려 나오고

덩달아 셀 수 없는 물이랑이 자맥질하며 내 나이 자꾸 건져 올린다.

 

그리움은 접어도 그리움인가

허리 숙여 연못 속을 들여다본다

목덜미 물렸는지 하늘은 온통 노을빛이다

하늘은 흐르고 꽃그늘이 머문 구름 속엔 우물거림으로도 잘 씹히지 않는

살아온 신발 자국이 숨바꼭질처럼 웅크리고 숨어 있다

어둠과 빛살 가득 담긴 신발을 펴 운동장에 활짝 펼쳐보면

내 나이는 신기하게 거꾸로 걷고 있고

몰린 피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나는 가끔 철봉에 발 얹기도 한다

 

하늘에 뿌리를 둔 탯줄이 연잎을 둥글게 경계로 밀어 올리는 지금

소금쟁이보다 짠하게 물 위를 걷고 있는

간간한 내 나이가 반으로 접히고 있다.

-시집 『점자, 그녀가 환하다』 2016. 시산맥사

 

 


 

 

박주용 시인 / 아내를 못 말리는 여자라고 하는 까닭은

 

 

시골길 가다 문득 차 세워 놓고

가느다란 목 코스모스에 기대고는

가을 적시기 때문이다

묻혀갈 한 평 남짓 땅, 저 구름 위에 자리 깔아놓고

시시각각으로 변해가는 양 떼며, 꽃이며, 새털 보며

하늘 적시기 때문이다, 맑은 개울

은빛 피라미보다도 속살거리는

미루나무 이파리 배꼽 뒤집히는 이야기에도

웃음 적시기 때문이다

아내를 못 말리는 여자라고 하는 까닭은

아파트 뒤편 산비탈, 예닐곱 평 남짓 뿌려놓은

쑥갓, 시금치, 상추, 열무 이름대로 고개 드는 모습에도

텃밭 적시기 때문이다, 비 내리는 날

아이들 자고 있는 도회지의 밤 일으켜

홍등 켜져 있는 동네 생맥주집에 앉아

궁둥이보다도 더 질펀하게

술잔 적시기 때문이다, 달빛 드는 베란다 무릎 사이로

민달팽이 한 마리 지나면 난초 촉 같은 곰삭은 첫사랑에

시동 걸다가도 이내 싱크대로 돌아와

손등 적시기 때문이다

 

-시집 『점자, 그녀가 환하다』(시산맥사, 2016)

 

 


 

 

박주용 시인 / 모서리

 

​마주하고 있어도 언제나 낯설지

네 낯이 없다면 내 낯 허물어진다는 것 알면서도

등지며 살지, 경계 만들며 살지

거울처럼 차가운 감정 맞대어 밀어 올릴 때마다

변방의 꼭짓점엔

자신을 내던지며 쑤셔박혔던 저 새들의 절망으로

푸른 멍울 자라기도 하지

외나무다리에서는 모눈종이처럼

마주 서는 시간과 떠나가는 거리 일정하지

속도 삐끗하면 서로에게 칼날 겨누지

칼끝에서는 꽃망울 맺히기도 하지

우리들의 임계점엔 모반의 꽃 피어나기도 하지

그래도, 둥근 장미 한 송이쯤은 품고 살지

너와 나는 태생부터 신이 아니지

모가 나 있으나 모가 나 있지 않지

마주하고 있어도 언제나 그립지.

 

 


 

 

박주용 시인 / 물푸레나무가 있는 풍경

 

내가 바라보는 풍경은

연두가 없어 보라도 없다

소실점 밖 나무들은 잎 하나 품지 못하고

염기 없는 생각들로 무채색 도배를 하고 있다

한때 나는 세상의 소실점에 태깔 나게 서고 싶었다

하지만 산발치에도 뿌리내리지 못하고 빛바랜 그림처럼 야위어 갔다

싱겁게 흐르는 구름에도 셀 수 없이 넘어졌고

움 하나 틔우지 못하는 얇은 귀도 바람 소리에 중이염을 앓았다

물관은 점점 말라 생각 하나 퍼 올리지 못하고 쩍쩍 금이 갔다

빛깔 없는 무채색의 세상에서

나는 더 이상 내가 아니었다

이제는 터치 한 번으로도 색 도드라지는

그림 그리는 여자 만나고 싶다

서 있는 배경에서 짙고 옅음 말하지 않아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내가 물드는 여자 만나고 싶다

손끝에 화려한 독 묻어있는 치명적인 여자라면 더욱 좋겠다

붓놀림 하나로도 열병 같은 꽃 피워낼 수 있다면

알몸으로 뭉개져도 좋겠다

원근법으로 다가오는 여자, 그녀의 농도 사랑하겠다

입술과 입술 포개지는 저 색들의 보색점에서

잎 하나 피워낼 수 있다면

눈썹과 눈썹 만나지는 저 색들의 소실점에서

열매하나 달아낼 수 있다면

색 우려내는 물푸레나무와 한세상 맛깔나게 살겠다

내가 바라보는 풍경은

주황이 있어 파랑도 있었으면 좋겠다

-시집 『점자, 그녀가 환하다』 2016. 시산맥사

 


 

 

박주용 시인 / 소금쟁이

 

 

아버지가 물 위 걷는다

물수제비뜨며 사뿐 강 건넌다

가벼운 몸무게와 젖지 않는 몸

얼마를 비워야 저렇게 가벼워질 수 있나

얼마를 젖어야 저렇게 젖지 않을 수 있나

정강이를 물 위에 내리고

수면에 온몸 맡기며 가고 있다

 

얼마나

간간한 표면장력이기에

저렇게 가뿐히 생을 건널 수 있는 걸까

 

-시집 『점자, 그녀가 환하다』에서

 

 


 

 

박주용 시인 / 쌀밥, 그 힘으로 살아왔다

 

 

호박잎 죽보다 옥수수 꽁보리밥보다

꺼끌꺼끌한 생

내 몸뚱이 작살나는 줄 모르고 하루하루 숨차게

살아왔어

벼 수매 가마니 푸른 도장 찍어 놓은 듯

파랗게 엎드려 숨죽여 있으라는 말씀은

나 두 번 죽이는 일인 거여

세상 일이 새참 먹듯

간간히 건너뛸 수 있는 거라면 몰라도, 그렇지 않다면

목숨 같은 쌀 가지고 농하지는 말어

우리 아버지의 아버지

그리고 아버지의 아버지가 오줌줄기처럼

노랗게 이어온 목숨이여

농사짓는다고 생각 없이 살아온 거 아녀

땅 소중한 줄 내 다 알고, 쌀 소중한 줄 내 다 알어

조상님들 뜻 따라

봄이면 자식 같은 종자 볍씨 내어

소금물에 숨 참아내고, 잿물에도 눈 발갛게 뜨는

튼실한 놈만 골라 생의 못자리에 발목 심으며 살아왔어

그 놈들 커가며 어디 재미만 있었겠어

푹푹 빠지는 물 수렁논

발목 관절염으로 쟁기질하고

속상한 갈비뼈 몇 개 꺼내 써레질도 하며

그렇게 삶 다독거리며

농투성이 이름 헛되지 않게 꾸역꾸역 살아온 거여

아. 그런데 이 짓 그만두라니

이 짓 하지 않더라도 보상은 해 준다니

자식 잃고 그 코딱지만 한 돈 몇 푼으로

해결이 되는 그런 경우는 아닌 거여

내 한평생 배운 게 이 짓여

더욱이 지금까지 수렁논에 뼈 빠진 게 얼만데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아버지

그리고 아버지의 아버지 뼈까지 합치면

헤아릴 수 없는 뼈가 이 논에 퍼렇게 숨 쉬고 있는데

여름이면 뻐꾹새 울음처럼 볏대가 쑥쑥 자라고

가을이면 자식 불알처럼 축축 늘어진 씨알이

흐뭇하게 한 논 가득한데

임자 없는 무덤처럼 덥수룩 묵정논 만들라 하면

그게 될성부른 소리여

어림없어. 생각 없이 그런 말은 말어

요새 신문 널찍하게 차지하고 있는

윤기 잘잘 흐르는 캘리포니아 평원이나

인더스강 유역과는 비교도 안 되는

텃논 몇 마지기 가지고

땅땅거리고 싶어 어깃장 놓는 거 절대 아닌 거여

조상님네들이 그리 한 것처럼

그냥 내 땅에서 내 손으로 생 가꾸고 싶은 거여

무슨 욕심 있어서가 아닌 거여

쌀밥 한 사발 고봉으로 얹어 먹고

내 땅에 발 디디고 있으면 등뼈가 슬금슬금 일어서고

소싯적 배운 신석기 시대 그 힘센 황소처럼

손아귀에 불끈불끈 힘이 솟아올라 그런 거여

너무 옥죄지는 마. 꽃차례도 마디 돋을 만큼 여유로워야

목 내밀고 꽃 피우는 법인 거여

우루구아인지, 우라질인지 나 몰러

쌀시장 개방인지, 견방인지 나 그런 거 잘 몰러

들꽃묶음처럼 볏단 하나 세워두면

그냥 자식새끼 세워둔 것처럼 뿌듯해서 그런 거여

다른 뜻 없어, 정말 다른 뜻은 없어

쌀밥, 그 힘으로 나 지금까지 살아온 것처럼

앞으로도 그렇게 살고 싶어 그런 거여

정말, 그런 거여

 

-시집 『점자, 그녀가 환하다』에서

 

 


 

박주용 시인

충북 옥천 출생. 충남대와 건양대 대학원 졸업. 2014 《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으로 등단. 시집 『점자, 그녀가 환하다』 『지는 것들의 이름 불러보면』. 현재 화요문학 동인, 시산맥 특별회원, 건양대학교병설건양고등학교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