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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현숙 시인(뿌리) / 세상 따라잡기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1. 7.
김현숙 시인(뿌리) / 세상 따라잡기

김현숙 시인(뿌리) / 세상 따라잡기

 

 

세상은 바람결 따라 변하고

 

그것을 따라가는

 

나는 늘보원숭이 같다

 

키오스크 앞에 서면

 

밥 먹는 걸 잊고 싶고

 

커피 한 잔은 호사다

 

주문을 하는 손은

 

갈 방향을 잃고

 

바탕화면을 헤매고 있다

 

긴 시간 헤매다 보면

 

뒷사람 눈치가 보여

 

도움의 손길이 절실하다

 

인건비가 뭐길래

 

직원은 간데없고

 

나는 민폐 주의보를 발령 중이다

 

 


 

 

김현숙 시인(뿌리) / 덫

 

 

별을 찾아서 헤매는데

길을 건너는 고라니 한 마리가 나타났어요

 

고라니의 붉게 빛나는 눈빛은

밤을 뜨겁게 태워버리고 싶은 수컷의 갈망이었지요

 

어찌 내 가슴이 이리도 먹먹할까요

산다는 것은 술에 취해 알몸으로 별을 찾다가

욕정의 덫에 걸려드는 것

오늘 밤 그 덫에 걸리고 싶습니다

 

별이 쏟아지는

찬란한 언덕 위에

사막을 걸어온 나그네처럼 주차를 했어요

 

라디오를 켜고 누군가의 목소리를 찾아

우주에 주파수를 맞춥니다

밤하늘이 옷을 한 겹씩 벗을수록

별이 하나 둘 내 몸속으로 파고듭니다

 

세상을 붉게 살아간다는 것은

사막에서 낙타의 눈을 통해

오아시스를 찾아내는 일입니다

 

삶이 시계처럼 정확해지는 날들은

오래된 톱니바퀴 한 개 뽑아버리고

밤하늘의 별이 되고 싶어요

 

내게로 와서 백허그를 해보세요

바람 부는 언덕에서 카섹스는 어때요,

별이 찬찬히 내려다보는 자정 무렵

 

 


 

 

김현숙 시인(뿌리) / 댄스 댄서

 

 

5월의 장미 정원으로 오세요

태양이 내리쬐는 꽃밭에는

나비와 벌이 춤을 추며 날고 있어요

 

장미 향기가 진동하는 붉은 양탄자 위에서

캉캉드레스 치맛단을 팔랑거리며

당신과 손을 맞잡고 한바탕 춤을 추어요

 

한 줄기 바람이 지나갔어요

꽃바람인가 싶어 귀를 쫑긋 세우는데

꽃보다 더 아름다운 당신이 내 심장 속으로 들어왔어요

 

우리 다시 춤을 출까요

내미는 손끝으로 장미꽃 한 송이를 전합니다

당신의 환한 미소를 나는 믿으니까요

 

오늘 밤은 촛불 하나 켜 놓고 당신을 초대할게요

레드와인 한잔에 귓불이 붉게 달아오르면

나는 당신과 영원불멸의 불장난을 하고 싶습니다

 

 


 

 

김현숙 시인(뿌리) / 매머드

 

 

 코끼리를 닮은 거대한 동물의 뼈가 발견된다 사라진 것들은 언젠가는 모습을 드러낸다 복원 작업이 한창이다 흩어진 뼈를 맞추는 것은 몸통을 세우는 기초 작업이다 뼈에 숭숭 구멍이 나고 있다는 의사의 말에 나는 빙하기 마지막까지 살았던 매머드의 뼈를 생각한다 어금니가 빠질 즈음 올라오는 구취와 통증, 내 안에도 어린 매머드의 상아와 부러진 발목뼈가 있는 걸까 무게를 못 견디고 내려앉은 등뼈들의 무덤도 있겠지 골밀도 주사를 맞으면 약물이 온몸으로 퍼진다 내 안의 매머드 뼈를 복원하기 위해 척추를 일으켜 세운다 나는 어느새 거대한 매머드처럼 리엔드에 몸을 누인다 물리치료사의 손이 삐거덕거리는 짐승의 발굽 소리를 쓰다듬을 때 뼈의 마디들이 알펜호른을 불며 긴 호흡을 맞춘다 내 사랑의 조각들도 그리 맞추어질 수 있을까.

 

-시집 <에로스> 중에서

 

 


 

 

김현숙 시인(뿌리) / 버킷리스트

 

 

번지점프를 하러 갔다

아이들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몇 번이나

아이들의 얼굴을 들이마시고 뱉어내고 하였다

설마 이대로 가는 건 아니겠지?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아 있는데

한 마리 새가 되어 낙하를 했다

별이 빙글빙글 지나가고

스치는 이름들이 바람에 맴돌았다

휘청거리는 밧줄에

휘청거리는 찰나들이 눈을 감았다

내 생의 점프를 한 번쯤이라 적었다

 

-시집 <에로스> 중에서

 

 


 

 

김현숙 시인(뿌리) / 미슐랭

 

 

여행을 하다가

우연히 들어간 음식점에서

아주 환상적인 식사를

하게 된다면 이 또한

얼마나 커다란 행운일까?

 

별이 달린 호텔

별이 달린 레스토랑

별처럼 빛나는 사람들이

웃음꽃을 피우며 하는 식사는

소화의 방식도 별다르겠지

 

아무나 갈 수 없게 된

일본의 유명한 스시 집

구순을 넘긴 오노 지로는

별 세 개를 지키기 보다는

손님과의 눈 맞춤의

거리를 지키려 한다

 

혹자는 비난을 하겠지만

혹자는 박수를 보내기도 할 거야

미슐랭 또한 최고의 음식점을 가려내는

정직한 눈을 가지려는 작업에

누군가는 두근거리는

심장의 박동 소리를 느낄 거야.

 

*미슐랭-레스토랑/미쉐린 가이드에서 음식 맛이 좋아서 별의 개수를 인정한 것

 

 


 

 

김현숙 시인(뿌리) / 벽오동

 

 

벽오동 꽃피는 그 집 뒤뜰 우물에는

달빛도 물그림자를 드리운다

언제 피어올랐는지 별처럼 잔잔한

노란 꽃잎들이 활짝 날개를 펼친

초여름 밤에 하늘에서 내려온

봉황 한 마리가 상서로운 둥지를 튼다

 

벽오동이 알알이 익어가는 가을이 오면

옥이의 키도 한 뼘 더 자라겠지

아버지는 어떤 간절한 마음으로

저 푸른 빛깔을 지닌 나무를 심었을까?

딸아 조금도 궁금해 하지 말거라

때가 되면 저절로 알게 될 거란다

 

봉황이 깃든 자리에 따듯한 봄이 오면

우물가에 아낙들 물 긷는 소리 들리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은

옥이와의 인연도 놓아 주어야 하네

벽오동나무에 톱질하는 소리 들리고

아버지의 땀방울이 눈물에 흥건히 젖는다.

 

 


 

김현숙 시인(수영)(뿌리)

국가평생교육진흥원 국문학과 졸업.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문예창작 전문가 과정. 2009년 계간 《뿌리》 등단. 시집 『내 마음의 꽃 등불 되어』 『꽃의 전언』. 후백 황금찬 문학상 본상 수상. 한국 현대사의 주역 인물전 수록. 현재 한국예총 서울지부 대의원. 한국문화예술 저작권협회 회원. 한국문학비평가협회 사무차장. 한국문인협회 서울지회 이사 역임. 강서문인협회 재정국장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