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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강은진 시인 / 카르마의 눈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1. 7.
강은진 시인 / 카르마의 눈

강은진 시인 / 카르마의 눈

 

 

엄마, 죽은 사람은 유리창처럼 투명해요

엄마도 알죠? 노랑색 셀로판지로 보는 느낌

모양은 없었지만 난 그것이 할아버지라는 걸 알았어요

엄마, 그런 건 느낌으로 그냥 아는 거예요

 

내가 알아보면 놀라실까 봐 못 본 척 지나가는데

이상하게 슬퍼졌어요

거기서 슬픈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나는 것 같았거든요

 

그날 밤 할아버지는 파랗게 빛나고 있었어요

물고기 알처럼 투명해서 할아버지 뒤로 빈 의자도 보였어요

달처럼 둥둥 뜬 채 앉아서 나를 보며 조금 웃었지만

어쩐지 울 것 같은 얼굴이었어요

 

그런데 엄마, 슬픈데 안 슬플 수도 있어요?

할아버지는 꼭 그런 것 같았거든요

나를 보고 안녕, 하듯이 손을 한 번 흔들었는데

손바닥에서 파란빛들이 빙글빙글 돌다 사라졌어요

할아버지도 금세 사라져 버렸어요

나는 잠깐 눈을 깜빡였을 뿐인데요

 

엄마, 엄마는 정말 못 봤어요?

할아버지가 엄마를 지나서 걸어갔는데도요?

어디선가 까만 연기처럼 갑자기 피어올랐는데요

키가 작고 조금 뚱뚱했고 얼굴도 몸도 다 까만데 모자를 쓰고 있었어요

할아버지가 잘 쓰고 다니시던 그 회색 모자 있잖아요

천천히 천천히 엄마랑 강아지를 지나고 벽을 통과해서 방으로 들어갔어요

잠깐 외출했다 돌아오신 것처럼요

파란 별들이 할아버지를 맴돌다 함께 사라졌어요

 

하지만 엄마,

난 이제 할아버지가 어디엔가 계속 있다는 걸 알아요

 

발도 없었는데 어떻게 걸었을까요

엄마, 할아버지는 구름이 되었나 봐요

 

-시집 『달콤 중독』에서

 

 


 

 

강은진 시인 / 기호들

 

 

딸기 사탕에 개미의 표정이 달라붙었다

이목구비는 정확히 반으로 접힌다

좌우대칭의 안락함

 

식당 유리창에 크게 적힌 김두삼

작은 글자들이 그 옆에 옹기종기 붙어있다

김치 두부 삼겹살

가지런한 도열이 마음에 든다

 

입술에 노래에 발가락 끝에

끈적하게 매달려 있는 건 어제의 감정들

 

목구멍 깊숙이

스무 살의 겨울과 아빠와 메리 같은 죽은 것들을 넣고

몇 개의 당신들을 잘게 뱉어냈다

누군가 내 귓불을 양쪽으로 길게 잡아당겨 놓았다

코가 간질거렸다

 

견딜 것인지 취할 것인지

선택해야 하는 순간

 

딸기 사탕에는 딸기가 없고 개미에겐 허리가 없다는 당혹

 

모르는 남자가 그립다고 말한 순간부터 정말 그가 그리워졌다

아니어도 상관없었다

 

새들은 구름의 허리를 물어뜯으며 석양 뒤로 사라졌고

나는 정확히 반으로 응축되어 녹아버렸으므로

붉고 달콤한 표정으로 일목요연하게 정렬되었으므로.

 

 


 

 

강은진 시인 / 가끔 신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크리스마스이브에 그는 늘 화가 나 있었다

네가 크리스천이야? 다그치면

온몸에서 보이지 않는 비늘들이 후두둑 떨어져 나갔다

 

선물로 주려고 약국에서 사 온 비듬약에

빨간 리본을 달아 놓았는데

 

우리는 버려진 연인들

 

벌레가 자기만의 모랫구멍으로 숨어들 듯

어둠 속에서 눈을 내밀고

작은 알전구들이 번갈아 깜빡이는 걸

말없이 보고 있으면 안 되었던 걸까

 

신이 오셨다는 날에

나에겐 신이 없어서

표정을 두 무릎 사이에 묻어 두고

깍지 낀 손으로 꼭 감싸고 있었다

얼굴이 새어 나올까 봐

순대를 케이크처럼 쌓아 작은 바람을 후 불면

나처럼 신이 없었던 아빠가 그 밤에 다시 와서

달력 뒷면으로 싼 공책이랑 연필 같은 걸 놓고 갈 수도 있잖아

 

죄 없이 호되게 벌을 받거나

정확히 걷는데도 자꾸 넘어지면

가끔 신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 우리는 벌 받는 마음으로 김밥과 순대를 먹고

입이 비린 채로 어둠을 옷처럼 걸쳐 입었다

 

아무리 화를 내도 가난은 숨겨지지 않았지만

죽은 비늘처럼 떨어지곤 했던 눈발이

이따금 아름다웠다,고 말한다

 

무언가 키득 웃으며 옆을 스치고 지나갔는데

극소수만이 알아챌 수 있는 종류였다

 

내일의 그리스마스는 김밥과 순대 사이에 우두커니

 

-『현대시』 2021-11월(383)호

 

 


 

 

강은진 시인 / 비운

 

 

내 손바닥을 들여다본 사람이 말했다

 

단명할 거야

음악가가 못 되면 시인이라도 되겠어

 

손바닥에 운명이 그렇게 훤히 새겨져 있다면

난 시인 말고 그걸 읽어주는 사람이나 될 걸

 

피아노가 미치도록 배우고 싶어서

밥상에 길바닥에 온통 건반뿐이었는데도

아빠는 끝내 피아노 학원에 보내주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것이 시 같은 걸 쓰게 된

내 운명의 결정적 순간이었다는 거다

 

유난히 짧은 생명선을 본 순간

사람들의 얼굴에 돋던 표정은 연민이 아니라 공포여서

볼펜으로 피가 날 때까지 손바닥을 긋다 잠들었던 날들

 

자고 나면 잉크가 지나간 자리에

새로운 운명이 용암처럼 터져 나와 굳어지기를

그건 신이 못 들은 척했던 기도였는데

이젠 요절 시인조차 될 수 없는 나이니까

슬픔 없이는 아무와도 손잡지 말 것

 

내 뜨거운 이마를

차가운 손바닥으로

오래 오래 짚으며

당신.

 

 


 

 

강은진 시인 / 나만 아는 물고기

ㅡ의미에 가 닿지 못하게 되리라. 바로 거기에 진리가 있다*

 

 

서툰 거짓말처럼 도무지 어디서 멈춰야 할지 알 수 없는 때가 있다

어제가 지나가면 또 다른 어제가 오고

약속한 날은 영영 오지 않는다

 

우리에게 네가 얼마나 큰 사람인지 아느냐고

그러니 무너지지 말라고

 

아빠의 그 말 때문에 지금껏 맘 놓고 울지 못했는데

또 다른 어제는 계속 오고 있고

언제까지요? 도대체 언제까지?

 

꿈을 계속 꾸면 내 꿈속에만 있는 그곳이 언젠가는 정말 여기에 올 것만 같아

 

나만 아는 연못에 사는

나만 아는 물고기

옆구리를 조금 다친

작은 빨간 물고기

 

있었다 없어지고

없었다 나타나는

오늘

 

어제 꾸던 꿈을 꾸고 싶은데

도무지 한 문장도 나아가지 못할 때

 

아직 한 번도 보지 못한

나만 아는 빨간 물고기는

무수히 밀고 들어오는 어제들과 꾸다 만 꿈 사이에서 서툰 거짓말처럼 헤엄치고 있다

 

 


 

 

강은진 시인 / 해피엔딩

 

 

그리고 창백한 고요가 시작되었다

모든 이야기는 태어난 곳에서 소멸하고

텅 비어버린 하늘 끝에 어쩌자고 백발은 흩날려

 

닫힌 문 앞에서 온종일 기다리는 늙은 개와

그 가지런한 앞발의 질서

이미 사라진 시간을 기억하기 위해

우리는 길게 자라난 서로의 귀를 차곡차곡 접어준다

 

이제 나는 심장이 없는 사람

반짝반짝하게 닦아놓은 구두의 앞코처럼

한 방향으로 흘러가 돌아오지 않는 기억

박제된 붉은 동백의 계절

눈은 내리지 않고 엄마는 더 이상 울지 않고

 

나는 영원히 아프지 않은 사람

가지런한 앞발과 잘 접힌 두 귀를 가진 사람

한 번도 말해지지 않은 인사를 삼키며

 

안녕, 나의 산타클로스

안녕, 안녕히.

 

-계간 『포엠포엠』 2012년 여름호 발표

 

 


 

 

강은진 시인 / 착한 아이는 울지 않아요

 

 

 착한 고양이의 수명에 대한 설은 극명하게 반반이다. 성격이 느긋해서 오래 산다거나 너무 참아서 일찍 죽는다는 것.

 

 27년 된 우리 동네 동물병원 수의사는 구름이처럼 착한 고양이를 27년 동안 본 적이 없다고 한다. 빵 반죽이 정오의 고양이처럼 축 늘어지는 계절이 오고 있다.

 

 과발효된 반죽이 성근 거미줄처럼 폭삭 주저앉으면 적당함과 과함의 중간쯤에서 착한 심장이 조용히 두근거린다.

 

 착한 아이는 울지 않아요, 어른들은 착함으로 슬픔을 감추는 법을 가르쳤지만 나는 매일 울었다. 울면서 착함에 대해 생각하며 다시 울었다.

 

 우리 동네에서 1994년 이래 가장 착한 고양이는 뭉게구름 같은 눈으로 계절을 삼키고 더욱더 착해진다.

 

 착한 아이는 울지 않아요, 착함 속으로 내 슬픔을 유폐했던 어른들의 눈동자가 햇빛처럼 내리쬔다.

 

 우리 동네에서 제일 착한 구름이가 언젠가 털뭉치를 뱉어내듯 뜨거운 계절을 게워내면 우리는 동네에서 제일 시끄럽게 우는 연습을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 동네에서 제일 폭신하고 착한 빵을 구울 것이다. 착하다는 형벌을 이제 빵에게 내어 주기 위해.

 

 


 

강은진 시인

1973년 서울에서 출생. 이화여대 국문과 졸업. 고려대 국문과 대학원 석사 수료. 2011년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이만호 할머니의 눈썹 문신〉이 당선되어 등단. 시집: <달콤 중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