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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희 시인 / 공기 속에서
폐와 부레의 형성 기원을 생각한다 코와 아가미의 전혀 다른 형태를 생각한다 부러진 손가락과 부드러운 지느러미가 생각난다 가까스로 살아난 이들의 상처 입은 심장과 끝내 돌아오지 못한 이름들의 생년월일 성별 직업 인종 국적 고향마을 좋아하던 색깔과 노래 동물 첫사랑 부모형제 친구 이웃 동료들 지구는 둥글다 살아 있어서, 사람이라서 오른쪽으로 23.5 도 기운 채 자전하는 지구와 왼쪽으로 기울어 영영 가라앉은 이들을 아무래도 생각하게 된다, 울면서 누가 정했을까 비슷한말과 반대말을 가르는 기준 아픈 말과 말 같지 않은 말이 생각난다 둥근 공과 평화의 상관관계에 대해서는 갸우뚱한다 물속에선 곧장 물고기가 되었으면 두 다리가 스르륵 뗄 수 없이 엉겨 붙어버리고 공기 방울뿐인 말밖에 할 수 없게 되더라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비늘과 지느러미를 가진 생명으로 헤엄쳐 멀리 사라진 것이라면 비참한 세계의 공기를 호흡해야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전혀 모르는 사이에 서른여섯 번째 사람* 이기 위한 서른일곱 번째 사람으로서 살려고 애써야 한다 * 이 세계가 망하지 않고 존재하는 이유는 36명의 의인이 세계의 고통을 모두 흡수하기 때문이며 그 중 하나가 죽으면 다른 의인이 나타나 그 숫자를 채운다. - 도정일, 「 쓰잘데없이 고귀한 것들의 목록 」 에서
이진희 시인 / 사람의 학교
구사일생 목숨을 구하여 살아가느니 슬프고 쓸쓸한 일
부모와 이웃 웃음을 잃은 소년에게는 아직 부싯돌과 보랏빛 싹이 튼 감자 한 자루 자유로운 손발 아버지의 다정한 말이 남아 있다
살아남아라 은신처보다도 친구를 찾아라 춥고 깊은 겨울 숲이라지만 어디엔가 너와 같은 친구는 있다
총 대신 기타를 둘러멘 친구 그가 부른 노래의 흔적을 찾아 나서기 전 동굴을 태운다
울지 말아라 기운이 남아 있는 한 걸어라
침묵의 술잔을 마신 눈이 내리고 쌓여 아아, 어둠에 휩싸여 외마디 비명처럼 자작나무 가지를 찢는 밤에도
울지 말아야지 열심히 걸어야지
쉴 때면 감자의 보랏빛 싹을 도려낸다 한겨울에도 연주를 멈추지 않는 친구에게 구워주려고
이진희 시인 / 실비아 수수께끼
실비아 실비아이기도 하고 실비아가 아니기도 한 모든 실비아 혹은 특별한 어떤 실비아
처절하게 이기적이고 싶은 실비아 착하구나 장하다 칭찬받고 싶은 실비아 날마다 자기를 부정하는 실비아 그래서 자신을 어느 날은 소녀라고 어느 날은 소년이라고 틀림없이 믿는 실비아 아무것도 아닌 먼지거나 쓰레기였다가 전능하기 짝이 없는 실비아가 되고 싶은 실비아 죽도록 살고 싶은 실비아 그래서 사는 게 헌신짝 같은 실비아 차라리 미쳐버리고 싶은 아름다운 실비아 새카맣게 응혈진 피의 매듭을 끊어버릴까 말까 고민하는, 고민을 진한 커피처럼 즐기는 실비아 시를 쓰고 싶지만 훌륭한 시를 쓰고 싶지만 쓰고 싶은 시를 쓰지 못하는 실비아 쓰고 싶은 시가 어떤 것이든 상관없는 실비아 다만 쪼글쪼글 늙어가는 실비아 쿠키를 굽지 않는 구운 쿠키를 먹일 아이를 낳지 않은 실비아
무엇이 실비아를 머뭇거리는 실비아로 살게 망쳤을까
실비아가 망치는 실비아 망가진 실비아가 복원하려고 애쓰는 실비아 망가진 실비아를 복원하려고 애쓰는 실비아
모두가 자기를 사랑한다고 착각하는 실비아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하는 실비아 한참 어리고 한참 늙은 실비아 한참 착하고 한참 나쁜 실비아 가스오븐을 분실한 실비아 일부러 분실하고 일부러 살아가는 실비아 혼자 처박혀 있을 때 세상과 함께하는 실비아
끝나지 않을 실비아 수수께끼 언젠가는 끝내야만 할, 끝내고 싶은 실비아 수수께끼
이진희 시인 / 종소리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지
즐거운 타인보다는 우울한 나를 설탕에 절인 딸기가 가득한 달콤한 단지보다는 벌레 먹은 살구가 담긴 낡은 바구니를 불쾌하고도 불완전한 시절을
부활한 사람의 아들 그를 낳은 어머니에게 무릎 꿇은 적 있다 오로지 육체의 통증 때문에
육체는 쓰디 쓴 약 그때에도 완전히 굴복하지 못했다 일요일 아침에 울려 퍼지는 종소리뿐 아니라 터무니없이 허약해진 정신을 백지 혹은 백치처럼 몹시 사랑했으므로
종소리는 총소리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것들 아름다워야 하는 것들을
이진희 시인 / 발 도르차 평원의 꿈
황금빛 밀밭이 평원의 바람처럼 일렁이는 아담의 초원이 그곳에 있었다.
사이프러스 나무가 초록초록 하늘을 찌를 듯 정겹게 줄지어 서서 아릿아릿 감성을 뒤 흔드는 곳.. 토스카나 발 도르차 평원을 꿈꾸다 사랑을 앓는다
황혼의 연인이 푸른 옷깃을 날리며 여유롭고 느긋한 단조롭고 온화한 일체의 사랑으로 하나가 될 빛의 기원으로 아, 너는 그곳에서 나를 기다린다.
이진희 시인 / 페이크
달콤한 말만 선물로 받을 거야 뭐든 좋아 달콤하기만 하다면
커다란 리본을 달아줘 커다란 선물을 보내줘 커다란 상자에 넣어서 커다란 꽃다발과 함께 커다란 케이크를 만들어줘
나는 부서지기 쉬운 불멸의 거울 소중한 보석으로 다뤄줘 언제 무슨 일을 저질렀든 나를 달래줘 언제 무슨 일이 벌어지든 나를 받아줘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다는 노래를 불러줘 꿈속에서도 들릴 만큼 재생해줘
나에게 잘못이 있다면 믿음과 의심이 동시에 깊었다는 거 단 하나의 마음을 모두에게 무한수열처럼 나열했다는 거
나는 진실만을 말하지 물론 맹세할 수 있어 이까짓 거짓말 내 앞의 당신은 달콤해야 하니까 당신 앞에선 달콤한 말만 선물할 거니까
커다란 리본을 달아서 커다란 선물을 보낼게 커다란 상자에 넣어서 커다란 꽃다발과 함께 커다란 페이크를 만들어줄 테야
줄게, 나를 달콤하게만 대해준다면 당신을 최고라고 느끼게 해줄게 쓰디쓴 것도 달콤하게 만들어줄게
이진희 시인 / 어디나 천사들이
한 천사가 허공에 떠 있다 날개 없이 여백 없이 몇백일째
이상한 빛깔의 봄여름가을이 가고 겨울의 싸늘한 혀가 그의 발등을 덮으려 한다 그들의 싸늘한 손이 그와 그의 이웃들의 존재를 덮으려 한다
지치고 피로한 노동자들과 사랑에 빠지라 머리가 세고 밤이 새도록 사다리를 치우고 그는 이미 지독한 사랑에 빠져 있으니 영혼이 수은거울처럼 창백한 이들, 그들이 내쫓은 사람들과 보일러처럼 켜지 않은 보일러처럼 뜨겁게 파랗지만 뜨겁게
그렇다 태초부터 지금까지 그를 통해 전달된 메시지는 사랑
스스로에게 좌절하지 않은 이가 캄캄한 허공으로부터 한 계단 두 계단 마침내 내려올 때 우리와 부지런하고 정직한 이웃의 기쁨은 물론 슬픔과 고통이 더욱 거세어질 것이다 미래이기에 현재이며 복잡하지만 고귀한 감정들 스스로를 올바로 사랑하고 모든 이웃을 오래 위로하는 어려운 일
어디나 천사들이 살고 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영혼을 파괴하고 혹사하려는 그들과 함께 투박하고 거친 손, 노동을 사랑하는 천사들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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