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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설 시인 / 옐로스톤 해빙기 눈물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고이는 것이라 썼다 지운다, ‘사랑의 다른 이름’* 뒤표지에 붙여 놓은 수면 테이프 같은
얼음이 녹는 시기는 얼음에 중요하지 않다고 썼다 지운다, 입술 가에 붙어 있던 잠이 깨었다가 다시 잠드는 것처럼
뜨겁던 몸이 더 뜨거워지면 목에 울음이 잠긴다고 썼다 지운다, 입술이 긴장한 입술을 꽉 붙잡고 있듯
불안하면 서로를 껴안는 어린 사랑을 안다, 한쪽이 놓아버리기 전에 한쪽이 녹아내리는
저 빙산에는 얼음 이전의 풍경들, 은하 모양의 먼지들, 천억 광년의 햇살들 그리고 사랑을 옭아매는 얼음이 무릎 붙이고 있다
애인의 눈을 바라보지 못하는 순간 애인은 녹기 시작하지, 그래서 빙하에는 이별이 들어 있지, 고독이라는 숨소리가 들어 있지, 너와 내가 산 채로 묻혀 있지 *이규리 시인의 산문집. -계간 『시와 시간들』 2025년 가을호 발표
문설 시인 / 가면놀이
무언가에 사로잡혀 날마다 악몽을 꾼다 아무도 모르게 남쪽으로 깊이 뿌리를 묻었지만 꿈을 벗어난 불안이 북쪽 창으로 잔가지를 뻗었다 간밤에 몰아친 번개와 폭우는 또 얼마나 무서웠던가 천운만이 목숨을 지키는 유일무이한 수단일지 몰라 밤이면 운명의 이파리를 하나씩 지상에 내려놓았다 바람의 목도리를 두른 계절의 오래된 냄새가 좋았다 화려한 기분에 우쭐대던 미숙함이 후회로 남고 손을 내밀어 구름의 기억을 꺼내 본다 흐린 날은 과거에 스친 미래를 알기 위한 것 어릴 때의 가벼운 말과 놀이가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정답을 얻으려면 가슴의 그늘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여름과 가을 사이 농익은 질투가 생겨나고 그 순간 둥근 열매가 맺히다가 지구와 충돌한다 다시 시작된 가면무도회는 공손하면서 관능적이다 누군가 몰래 눈물을 훔치며 떨어진 사과를 씹어먹는다 가면이 벗겨지자 마른 기도에서 붉은 피가 흐른다 해가 뜨면 한순간에 사라져 버리는 아침이슬 행성 저 너머 고독한 별똥별에 전하는 온유한 예언이다 누군가 북쪽 창문을 닫는다 -웹진 『시인광장』 2024년 8월호 발표
문설 시인 / 묻는다
지는 꽃 옆을 왜 기웃거리는지 이제 막 싹 틔우는 씨앗을 어디로 데려가는지 자작나무의 흰빛은 하늘에 닿는지 하늘 밖에 또 다른 하늘이 있는지 바닷속 오랜 유물들이 숨을 쉬는지 해바라기가 가을에 고개 숙이는 이유를 가마 속 옹기가 잘 익고 있는지 종일 내리는 비는 어디쯤 가고 있는지 향나무를 꺾어 머리 위에서 태우는 유목민들의 기도를 얼지 않는 호수가 누군가의 마음을 비추는 이유를 붉은발슴새가 그 섬에 온기를 두고 온 까닭을 나를 빼닮은 계곡이 속살을 보여주는 이유를 뜨거운 입술에 스친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건들건들 청보리밭을 흔드는 신을 섬기다 신의 성지가 되어버린 너는 얼마나 순결한지
문설 시인 / 물의 고백
장미 향기가 나면 괜찮을까 분명 호불호가 있을 거야 똥냄새도 거의 나지 않는다고 믿음과 의심 사이, 아무도 모르지
유리창에 흘러내리는 나는
어느 수면을 파닥거리다 여기 숨죽여 침묵하고 있나
말미잘과 흰동가리가 파놓은 터널을 통과한 기억 눅눅한데
누군가의 만남과 이별을 감지한 최초의 순간
머리를 감겨 주었을 때의 그 끈적한 촉감
흘러가는 방향을 생각하다 마주한 꽃잎들의 무덤
내가 절묘하게 떨어져 스미는 동안 눈빛은 투명에 가까워졌지
나무와 계곡의 산을 품은 바다의 성지(聖地)는 어디일까
출렁이는 나를 위해 불과 얼음의 존재를 묵인하며
언젠가는 개가 끄는 썰매를 타고 북극의 빙하나
사막의 모래 폭풍을 따라 소금 눈송이를 따러 갈 것이다
억만년을 품은 협곡이 유리창에 흘러내리는 이유는
한 번만 태어나는 뱃속의 기억 때문이다 나는
항상 돌아와 다시 불의 암석 위를 걸을 것이다
문설 시인 / 어쿠스틱 기타
손에 깍지를 껴자 음악이 흐른다
완성되지 못한 문장들이 혀끝에서 흩어지고
내 마음의 오류는 어디서부터였을까
비스듬히 벽에 서 있는 너를 보면
아무도 모르게 밤새도록 안고 싶었지
오직 너 때문에
밤을 새운 것은 아니었지만
우리의 이야기로 꽃이 피고지고
진흙을 구워 만든 줄 하나가 허공에서 춤을 춘다
춤은 불투명하지만 아무도 버리지 않는다
누군가 저 소리를 멈춰버리면
지독한 너의 흔적이 사라질까
시간 속에 남겨진 바닥의 힘을 꺼내먹는다
눈을 감으면
외딴 절벽 어딘가,
네가 우는 자리에 열리지 않는 문이 있다
문설 시인 / 사과나무 카페
계단조차 없는 벽장에 사과나무 카페를 차렸다
카페 천장에서 백열등 하나 부스스 깨어나고 처음부터 햇빛은 창문의 것이 아니었다
나를 닮은 그릇들이 하나둘 늘어가고 집의 중심이 벽장으로 옮겨갔다
마음대로 허리도 펼 수 없는 낮은 카페에서 날마다 사과를 깎았다
아무 잘못 없는 벽만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카페는 점점 사과로 채워져 껍질이 쌓이고 먼지가 쌓인 그릇들은 본색을 잃어갔다
사과나무 카페에는 사과나무 꽃이 피지 않았다
줄곧 어느 갈피를 찾아 뜨거운 밤이 휘리릭 지나가고 있었다 창문너머 유령이 보였다, 안 보였다 나 아닌 내가 거기 있었다
벽장에 갇힌 카페는 어느 계절에만 열렸다
사과나무 없는 사과나무 카페 이름만 있는 사과나무 카페에서
종일 그릇처럼 사과를 닦았다 -계간 『아라문학』 2022년 가을호 발표
문설 시인 / 새
담쟁이덩굴이 서로 몸을 섞더니 어느 순간 벽이 사라졌다 창살 사이로 보이는 거침없는 그 끝이 궁금하다
나의 하루는 대부분 멍하게 허공을 지켜보거나 힘없이 울음을 흘린다 난간에 앉아 쪽잠을 청하기도 한다 그마저도 시들해지면 엉덩이를 흔들며 짝을 부르는 일이다
나의 이런 행동은 모두 부질없는 짓 가끔은 숨이 탁 막힌다
지금 나는 털갈이를 하며 변신을 꿈꾼다 하지만 열리지 않는 문,
화려한 옷을 입고도 외출할 수 없는 난 이 불가해한 궁전을 빠져 나가 보는 것,
벽을 삼킨 담쟁이가 슬슬 다가오고 있다
문설 시인 / 철없는 꽃
그 어떤 불안이 꽃을 밀어 올린 것일까 잠깐 다녀간 볕의 끝을 맨 처음이라고 생각했을까 저것은 분명 꽃의 착각,
지나간 길을 뒤늦은 수소문처럼 두리번거린다
한 때 나도 그 길을 따라간 적 있다 가까스로 닿고 보니 겨울이었다 오돌오돌 떨며 그 먼 길을 되돌아왔다
나는 늦은 것일까 빠른 것일까 저 꽃은 빠른 것일까 늦은 것일까
착각의 힘으로 살아가는 나는 이 계절을 꿈이라고 믿는다
꽃은 나를 삼키고 유서 같은 이파리의 울음을 토해낸다
엎치락뒤치락 바람이 앉았던 틈새로 하혈이 산을 오른다
피는 것은 지는 것이므로 흙을 툭툭 털며 누더기를 입은 발이 산을 열고 나온다
문설 시인 / 에스메랄다* 그 후
불신에는 지독한 뿌리가 있고 나쁜 기억이 더 좋을 때가 있습니다 뾰족한 것들은 뾰족한 것들만 모이는 습성이 있습니다 끝을 모르는 종탑에는 아무도 오지 않을 테니까요 옅은 빛이 몰려오고 잠에서 깨면 당신은 또 그녀를 기다리겠지요 금단이라는 말에 빠진 사랑은 누구도 사랑할 수 없다는 말이지요 허공을 잡으려 허우적거리는 그녀의 손짓을 기억하지 말아요 잡았던 것이 무엇인지 모르면서 움켜쥐었던 그녀의 손이 바닥으로 떨어집니다 잠시 쉬어가는 햇빛의 그늘이 푸릅니다 선택을 위한 선택에는 행복하지 않을 것이라 단정을 짓지 마세요 저 선택 속으로 누구나 걸어갈 수는 없으니 당신이 가진 고급스러운 울음주머니만 생각하렵니다 그러나 마르지 않는 샘 같은 울음주머니도 바늘자국만 남았습니다 오늘 아침 9호선 환승역으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당신을 보았습니다 당신은 신이 숨겨 놓은 곳에 사는 종이었습니다 종루도 없는 곳에서 종이 발견될 때마다 춤을 춰요, 콰지모도 당신의 가면은 오늘 밤 최고일 거예요 바늘자국 위엔 녹슨 바늘자국이 쌓이고 하루가 지나가겠지요 가장 사랑하는 것을 위해 가장 사랑하는 것을 버려야 할까요 죽음이 춤이 되는 커튼콜로 한 시대가 저물어갑니다 당신이 그녀를 살렸다고 확신하지만 당신은 무대의 주인이 아닙니다 깊고 넓은 당신의 기도는 먼 길 떠나는 사람의 등을 닮았습니다 저주받은 영혼은 태초에 없겠지요 불신과 불행은 늘 뾰족한 것들을 불러들입니다 새벽이 오는 소리에 당신을 풀어놓아요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에 등장하는 집시
문설 시인 / 태양이 지고 있으므로
마녀는 우리 주변에 있다
동전이 바닥에 구른다 변하지 않는 것은 죽은 것과 같다 하늘과 구름 사이를 날며 기도한다
큰소리로 사람들의 이름을 불러주는 것은 운명을 바꾸는 법 이미 이루어진 것과 이루어질 것은 소리를 통해 확률을 높인다
구름과 구름 사이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다
하늘에 떠 있으면 안다 지상의 꿈이 얼마나 빈한한지
왼쪽으로 기울었을까 오른쪽으로 기울었을까 불안한 기도가 비난처럼 피었다 진다
언젠가 쓸어버릴 수 없는 속도를 찾겠지
나는 스페인 광장의 플라멩코를 탐닉하고 당신은 파티마 대성당의 기적을 삼키고
오금이 저리도록 속삭여도 끝나지 않을 이야기
동전이 허공을 구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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