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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희 시인 / 일흔 즈음에
주위를 둘러보면 호시탐탐 복병이 숨어 산다 움직이는 모든 기능을 마비시키는 독버섯들
자유를 박탈하고 순발력은 둔해지고 기억마저 더덤수놓는 늙음의 현상
나이을 먹는다는 것 언젠가는 혼자가 된다는 것 그리고, 먼지되어 영원히 사라질 잊어가는 것에 대한 포기 바람 앞에 등불이라 할지라도 장애물 피해가는 순간의 위기 그, 버거움 새처럼 가벼워질 수 있을까
사는 것이 잠깐 예행연습이라 생각한다면 그 또한 무심히 지나가리라
김남희 시인 / 계곡 바람
휘파람에 마음 약한 걸 어떻게 알고 산에 사는 계곡 바람 김남희 바위 뒤에 숨어서 인기척 날 때마다 휘파람 불어 설레이는 내 마음 훔쳐가네
김남희 시인 / 백천향가白川鄕歌
天命으로 地名받은 산수좋은 백천골에 주인은 마실가고 손님들만 북적대네
와룡산 산자락에 스친 因緣도 인연인데 입소문이 아니라면 뜬소문이라도 百泉寺 가는 길목에 人心 좋은 부부가 살고있어 물한모금 布施받고 가더라고 말씀이나 전해주오
김남희 시인 / 고향의 노래
누가 여기에 문명의 첫 낙관을 찍었는가
무심한 바위도 흐르는 강물도 백옥 같다 해서 백천이라 불렀다는데 강물처럼 흐르는 게 세월이라고
더러는 자식따라 객지로 흘러가고 더러는 고향땅에 백골로 누워 사방을 둘러봐도 낯선 사람 뿐
간간히 스쳐 지나가는 바람에게 안부를 물어보네 산천도 변하고 인심도 변해버린 먼 기억의 뒤안길
와룡산 백천사 예불소리만 변할줄 모르네
-시집 『노을 속에 물들어가는 풍경』에서
김남희 시인 / 꽃잎 깨무는 아침
햇살 무늬보다 더 부드러운 구름 한 조각 부풀리고 있어요
안개 묻는 손등으로 눈물 훔치면서 떠나는 4월 배웅하기 위해 현기증 가라앉히는 아침
눈 감고 조용히 두 손 모아보면
잡동새 우는 개을 건너 아늑한 고향 불 들녘 뛰놀던 여자아이 우윳빛 살내음 같은 구름조각이 눈썹을 흔들며 수 만 개 문장으로 일어서는 아침
석양 다스려 밥물 넘치던 가난한 부엌살림 닦고 또 닦으시던 어머니를 생각하며 방금 태어난 우주 빈자리 찾아 넣기에 바쁜 아침 웃을 때 마다 드러나는 단짝친구 그 하얀 덧니처럼 참방대는 물방울이 아이스크림 같은 구름 부풀리고 있어요
오늘이 가벼워졌어요 줄어든 죄 몫만큼
-시집 『꽃잎 깨무는 아침』에서
김남희 시인 / 초승달
저것 봐 언니야 무심코 쳐다본 하늘 숯검정으로 눈썹 그려 마주 보고 깔깔대던 흰 버선발 치마폭에 감춘 속눈썹이 유난히 길었던 언니야 저것 봐 저것 봐 댓돌 위 코고무신 한 짝 초승달로 떴다야 한 획 그어 문양 새긴 초저녁 달
김남희 시인 / 유서를 쓰다
절벽인 줄 몰랐을까 대책없이 뛰어내리는 미련둥이 깨어지고 부서져도 새처럼 날개 달고 싶은 빗방울
내려다 보면 아득함뿐이라서 문득, 홀로 된다는 두려움 유서를 쓰는거야
똑, 똑, 똑, 지금은 연습 중
느낌표도 마침표도 없는 외침 곤두박질 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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