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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덕 시인 / 시인 투정
빗물에 패인 길 하나 오후 두 시의 창으로 쓸려온다. 영문투성이 약병을 열어 연분홍 알약 두 알을 삼킨다. 영문을 모르겠지만 가슴이 아프다. 또 누가 죽었거나 양장본 시집을 냈을 것이다. 등신의 세상에서 보란 듯이 등신을 증명하며 슬픈 지문을 페이지 곳곳에 묻혔을 것이다. 자기 죄에 중독되어 기꺼이 세계를 사면(赦免)했을 것이다 나리백합에 제 검은 키를 재 보았을 것이다. 오후 두 시 지나 뒷담을 타는 고양이 울음만 키 낮은 숲을 찢는다. 마른 봄에 밀봉했던 편지를 뜯으며 아직 개봉하지 못한 작은 약병을 응시한다. 잘못 들어가 박제가 된 거미가 사는 시집들. 천 개의 관을 방 사방에 쌓아놓고 영혼의 건강을 꿈꾸었다. 제길, 흰 꿈에 뼈를 갉아 은모래만 뿌려댔다. 비는 무섭게 와서 찰나처럼 제 습지의 길로 달아났다. 흐린 액정 아래 오늘의 날짜와 날씨를 확인하며, 선생에서 시인으로 환(幻하는 환(煥), 새로 경멸의 첫 매미가 운다. 장마는 이제 끝났나 보다.
백인덕 시인 / 늪
흔적도 없다. 이제 아무도 모른다 저녁에 죽은 고양이 밤새 내린 눈 새벽 간절한 비질 찬연한 아침이라지만
우주에서 생명은 과대평가된 현상일지도 모른다 다만, 먹고 사랑하고 기도하라 마다가스카르 카멜레온이 파리를 먹고 짝짓기하며 끔벅끔벅 하늘을 본다 이렇게 넓은 우주, 아무리 빠르게 혀를 놀려대도 그는 평생 1km2를 벗어나지 못한다. 끝의 가장 어둔 자리 한구석 이 행성의 특별함은 무엇일까?
속력을 이기지 못해 질량은 그 속도가 된다. 만나면 충돌하고 피어나면 지고 태어나면 죽는 것이고 사랑하면 어리석어진다 영원이라는 꿈 때문에
사라진 흔적 위에 어제와 같은 강도로 쏟아지는 햇살 질척이는 길을 가두기 위해 뭉뚝한 돌들이 충으로 엎드려 있다. 지상의 시력뿐인 생명에게 우주는 그저 헐거운 옷일지도 모른다
백인덕 시인 / 나는 내 삶을 사랑하는가?
쉴 새 없이 차량들이 들어가고 나오는 학교 앞 포장마차, 식어 가는 떡볶이와 어묵을 들어가고 나오는 차량처럼 번갈아 씹으며 자정을 향한 늦은 밤, 이십여 년 전의 그때처럼 난 혼자 되뇌었다. 나는 내 삶을 사랑하는가? 몇 몇 연구실의 불빛들은 아직 살아있지만 더 환하게 불 밝힌 건 대학병원 영안실, 가지에서 막 떨어지려는 꽃잎들이 내 흉한 어깨를 비스듬히 내려 보고 있다. 병원을 다녀야만 했을 시간을, 나는 풀리지 않는 숙취와 함께 학교를 다녔다. 그러므로 잘못 다녔다는 것이다. 거기 횔덜린도 있었고, 라깡과 아아, 헤겔도 있었지만 정작 내 손으로 꾸민 작은 정원은 없었다. 나는 내 삶을 사랑하는가? 이미 다 식어버린 어묵 꼬치를 간장에 찍으며 내게 정원이 있었다면 어떤 나무와 풀, 가벼운 돌 몇 개가 어떻게 놓였을지 꿈을 꾼다. 자정이 다 된 늦은 밤, 백일몽처럼 길을 찾는다. 자꾸 발길을 느리게 하는 잔바람, 나는 내 삶을 사랑하는가? 이 한마디로 이제는 시를 버려야겠다.
백인덕 시인 / 폐허의 사랑
먹구름 한 번 비쳐가지 않는 변두리 저수지
원래 있었다는 듯 배어나는 검푸른 어스름,
폐허를 기록하는 다른 이름은 첫사랑인가?
저절로 허물어진 담장을 끼고 녹슨 이를 드러낸 언덕길 선 채 말라죽은 나무 그 한가운데 윤곽만 남은,
수몰은 피해갔지만 적막을 비껴가진 못했다 정신의 피폐 생각하다 단한번 잘못 꺾은 산책길
사랑이 폐허처럼 오래 남기는 하나, 가만히 흔들리고 만다
백인덕 시인 / 아버지, 목련 한 그루
대문 옆 담장이 헐렸다. 쇠망치 두어 번에 맥없이 무너진 담벼락, 나는 멀찍이 전봇대 그늘 아래 담배를 피워 물고 시멘트 길바닥에 손톱 낙서를 하는데. 굳은 흙을 파헤치는 요란한 삽 소리, 하늘은 가깝고 골목은 자꾸 길어지는데,
아버지는 내게 목사가 되라 하셨다. ——신을 믿기엔 내 영혼이 너무 여려요 아버지는 내게 한의사가 되라 하셨다. 남을 진단하기엔 제가 너무 아파요 아버지는 내게 장군이 되라 하셨다. 당신은 소령. 그 말씀 받을 수 없어, 아들은 새벽마다 예배당에 엎드리고,
대문 옆, 목련이 뽑혔다. 아버지와 어머니, 두 살 여동생과 내가 한껏 웃고 있는 흑백 사진, 구멍에 흙을 북돋으며 잘근잘근 밟았다. 집을 나서면, 천지가 길이지만 목사처럼. 한의사처럼. 장군처럼 시를 쓰는 아침, 아무도 아프지 마시라. 아버지는 명령을 따라 한국인이 되었고, 그 말씀 못 받아 난 자유인이 되었다. 하늘은 가깝고 골목은 자꾸 길어지는 나이가 되었다.
백인덕 시인 / 행려
문 번호를 잊어 흐린 하늘이나 살피니 오, 멀다. 눈이 오시려나 영혼은 언제 몸에 스미나 아내가 오기까지 한 시간여, 이왕 떨 바야 근린공원 폐지 더미, 던져진 빈병처럼 웅크리리라. 식당 제육볶음과 소주 한 병을 사 밤의 빈 공원을 독차지했다. 개도 얼씬 않는데, 대저 사람 말이란 자기 밖을 찌르기 마련 밤은 절로 깊고 꿈은 천리를 다녀왔나. 어깨는 멀쩡하고 머리만 잔뜩 젖었다. 내리는 눈에 대가리를 디밀고 다리는 안쪽으로 당겨 천벌(天罰) 받는 자세로 졸았다. 오, 멀다. 언제쯤 맑아질 수 있을까. 핸드폰은 희미하게 울었고 소주는 반병 넘어 비었다. 공원 밖 길에서만 훤히 보이는 정자 아예 드러누워 몸을 숨기는데 덜 젖은 옷이 머리보다 가벼워 거뜬히 가라앉는다. 집 밖의 집을 찾았다.
백인덕 시인 / 떠오르는 배
부르는 이름마다 다 춥더라.
긴 살얼음, 부러진 칼날 번뜩이는 기슭, 사내 몇, 머리 위 헌 배를 뒤집어쓰고 떨어져 나간 사지는 잊은 채 검게 돌아오고 있다. 흐르는 피조차 없는 길을 씩씩하게 걸어 나온다. 풀숲 빈 둥지의 쥐새끼들이 도망치고 따스한 햇살은 차라리 저주에 가까운 것, 자꾸 무너지는 꿈의 바깥이 얼음 그대로 땅에 박힌다.
가지런히 머리를 뉘이면 찬란해 날 선 꿈인들 왜 없었으랴, 더운 가슴은 습지를 빚어 밥풀 꽃망울인들 터뜨리지 못했을까? 오로라, 빛은 열이 없어 머리에 헌 배를 인 채 사내 몇, 옴짝달싹할 수 없는 잠에 든다. 억세고 두터운 잠결, 허한 날 북풍은 끝없이 맨 살갗을 저며 대지만 뜨거운 이름이여, 어디서 포근한 몸 누이는가?
부르는 이름마다 다 춥더라.
-시집 『북극권의 어두운 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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