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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보경 시인 / 이상한 나라의 선물 작고 희미한 등불을 들고 층계를 오르며 꿈을 꾸는 사람처럼 너는 웃었어 그토록 기다려온 선물을 들고 비로소 너는 웃었지 선물을 묶은 리본을 풀어야지 강처럼 풀린 리본을 들고 댄서처럼 춤을 출 거야 겨울이 다시 여름이 되었을 때를 상상하며 선물을 열어볼 거야 풀어보자 그토록 기다려온 선물 선물 같은 이상한 것 품에 꼭 안아볼까 차라리 이야기를 해봐 아라비안나이트 같은 끝이 없는 이야기 풀리고, 풀려서 나오는 신비한 이야기 같은 것 황당하고 이상한 이야기 이야기 같은 선물 안아보자 따스할 거야 무서울 거야 무거울 거야 잘 모르겠어 하루 종일 눈이 내리고, 그치고, 다시 내리고 선물 같은 눈 눈 위에 고양이 발자국이 일렬로 찍혔어 이건 고양이의 선물 밤이 오고, 아침이 오고 겨울이 오고, 여름이 오고 선물에선 끝도 없는 이야기가 계절을 넘어 풀려나오고
하보경 시인 / 각시수련
발견되기 좋은 날이다 발견되기 좋은 장소에서 너는 기다려주었다 그랬던 것 같다 꿈이었다 꿈, 같았다
별 하나를 찍어 포토샵으로 별 궤적을 그리고 있었다 신을 그리고 있었다 선을 만들고 있었다
경계를 그으며, 경계를 만들며 넌 그곳에서 무언가 말하고 싶었다 거기까지야 이제 시작이야 아름답군, 참혹하군
늘 그렇듯이 어제는 어제고 오늘은 오늘 비명과 침묵의 경계에서 각시수련을 보고 있었다
종일 그랬다 누군가 자세를 낮추고 자꾸만 셔터를 눌렀다
- 월간 《현대시≫ 2023년 1월호
하보경 시인 / 우리는 망고가 아팠지만
노란 신발가게 앞 투명한 창 사이로 서어나무 푸른 그늘 사이로
망고를 먹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길고, 깊은 햇살이 서랍 속 그늘을 쥐락펴락하고
발걸음이 층계를 따라 올라가면 목구멍 같은 그늘도 함게 따라오는데 난 또 그것을 어쩌지도 못하고
망고를 먹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우리 이렇게 늙어가도 좋은 걸까? 떠돌이 개에게 익숙한 눈빛을 던져 주고
이곳엔 구름이 흘러가고 이곳엔 미운 애인이 없고
망고를 먹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우리는 걸어갔다 무릎이 아팠지만
와당탕탕 쏟아지는 소나기를 피하던 서어나무 푸른 그늘 아래서
우리는 자멸하진 않을 것이다
-시집 『쉬땅나무와 나』에서
하보경 시인 / 손
내밀어 보세요 그건 혀에요 혀는 조롱과 감동을 구분 못해요 조통 속에 든 새도 그건 알지요
나는 따스함을 원해요 슬며시 잡아 주는 법 체온에 체온을 보태는 것 슬며시 스미는 것 노을이 하늘에 스미고 바다에 스미고 스며든 자신조차 없이 사라져 버릴 때
산양은 왜 가파른 절벽만 좋아하는지 나는 모르겠어요. 날개가 달렸다면 참 좋을 텐데
뿌리가 있어요 흙을 단단히 움켜쥐었죠 흙이 움켜쥔 건가요? 뿌리의 힘이 풀릴 때면 아마 서로 자연스레 놓아 주겠죠
하보경 시인 / 가문비나무
나무 안에 살던 푸른 짐승이 바이올린을 켠다
바다로 흐르지만, 결코 바다가 되지 못하는 오카방고 습지의 수천 마리 물소 떼며, 코끼리 떼 기나긴 건기, 사자들에 대해
흰꼬리수리의 기나긴 비행과 그들이 건넌 낮과 밤에 대해
살아 있는 화석인 투구게의 질긴 눈망울에 대해 생각한다
삶을 관통하는 수많은 그늘에 대해
늘 맹목이었던 빛에 대해
툭툭 놓아버렸던 힘없던 팔들에 대해
오래 생각한다
푸른 짐승의
속울림이 맑게 흐른다.
하보경 시인 / 출렁
내가 그린 것은 아직 오지 않은 파랑이다 파랑이 사라지기 전에 모든 파랑이 거기에 있었다 파랑으로 넘치던 골목과 골목을 흐르던 바람, 구름, 새
빛들은 파랑으로 사라지고 골목으로 잠시 출렁인다
거품으로 소멸하여 흐르는 하양은 파랑으로 흘렀지만 이미 파랑을 모르는 파랑이다 파랑, 거품, 하양, 갑자기, 넌, 잠시, 아마 말 못하는 것과 안 나오는 것의 차이를 앓는다
슬며시 옆으로 눕는다 자세는 아직 모호하다 어떤 추억은 아주 낯설다
처음부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던 것처럼 끝까지 아무것도 들리지 않을 것처럼
하얀 동그라미들이 파랑의 존재를 잠시 확인한다 파랑은 혼자서 번지며 그의 부재를 들여다본다 없다, 사라짐, 부재, 존재
조금 늦은 저녁을 굽는다 골목은 아직 오지 않았다
하보경 시인 / 낮 12시의 햇빛을 받으며
빛이 쏟아져 내린다 눈을 뜰 수 없다 양산을 쓸까 말까 머리칼이 반짝인다 이마가 따끈하다 흰 새가 날아간다 그녀가 걸어가고 그도 걸어간다 바람이 지나간다 환해서 캄캄한 낮이 지나간다 아파서 웃고 있는 내가 지나간다 그녀가 앉아 있고 그도 앉아 있다
무릎을 오므리고 손을 모은 네가 앉아 있다 멀리 보이는 소나무가 창문에 액자로 박혀 있다 소나무는 푸르구나 성실하게 푸르구나 붉은 소나무의 푸른 잎, 마음은 울고 입이 웃는 네가 보인다 그녀가 누워 있고 그도 누워 있다
유리창으로 들어온 많은 사물이 너에게 무어라 말을 걸기도 한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너, 마음으로 말하는 너 흰 새가 날아가고 많은 꽃들이 피어난다 부서지는 빛, 충만한 공간에서 시계를 본다 시계 추는 일 초도 쉬지 않고 정확히 흔들리고 있다
-『현대시』 2023년 1월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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